미국에서도 안 터지는 전화 때문에 일파만파 소동이 일기도 했다. 1971년 3월 미국 방송국들은 일제히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미사일 공격’으로 인한 비상사태 선포 소식을 알렸다. 소동은 40분이나 지난 후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방위경보망 장치 시험을 하다 벌어진 일로 드러났다. 냉전상황 속, 나라와 나라 사이 불통이 불러온 해프닝이었지만 1년 뒤 미국은 백악관 지하실에 모스크바·베이징으로 바로 연결되는 전화(핫라인)를 놓고 매일 아침 6시에 통화를 했다.
전화 통화가 우리에게 많은 역사·정치적 함의를 갖게 된 건 1972년의 일이다. 전쟁으로 서로 총구를 겨눴던 남북이 직통전화 가설 합의서에 서명했다. 서울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사무실에, 평양엔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사무실에 전화기를 놓기로 하고, 매일 아침 9~12시, 오후 4~8시에 열어두기로 정했다. 하지만 약속은 4년 뒤 일어난 북한 경비병의 도끼만행 사건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남북 간 전화는 북한 잠수정 강릉 침투사건, 천안함 피격 사건을 거치며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13개월간 끊어졌던 남북 간 통신선이 복원됐다가 지난 10일 또다시 불통 상태가 됐다. 통신 재개 2주 만의 일이다. 북한의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한미 연합훈련을 비난하면서 단절이 됐다. 자꾸 먹통 되는 남북 전화에 속 터지는 건 국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