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박스 11년…“유기아동 처음으로 보육원 아닌 위탁가정으로”

중앙일보

입력 2021.08.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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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창화 전국입양가족연대 대표 부부가 베이비박스 한 유기 아동의 가정보호를 맡게 됐다. 사진 김미애 의원실

갓난아기가 함부로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된 베이비박스가 국내에 등장한 지 11년이지만, 그 실태를 잘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1일 서울시와 전국입양가족연대가 개최한 행사는 그 ‘불편한 현실’을 알리면서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날 서울시 아동복지센터 아동일시보호소에서는 베이비박스 유기아동이 한 위탁가정의 품에 안겼다. 입양가족연대 측은 “보육원이 아닌 위탁가정의 품에 안기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년 동안의 일방적으로 있어왔던 시설로의 보호조치라는 관행을 깨는 역사적인 장면”이라는 보도자료도 냈다.
 
지난달 30일 태어나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남아는 서울시 아동보호센터에서 일시 보호를 받은 뒤 이날부터 오창화(51) 전국입양가족연대 대표의 가정에 위탁됐다. 베이비박스를 거쳐 보육원으로 간 아동이 1300명에 이르는 동안, 보육원이 아닌 위탁 가정으로 곧바로 향하게 된 첫 사례라고 한다.
 
유기 아동은 위탁이나 입양을 통한 가정형 보호조치가 우선 원칙이지만, 그동안 이 원칙은 지켜지기 어려웠다. 서울시는 영유아 전담인력 부족, 보호시설 내 정원 초과 등 문제가 있었다. 베이이박스 아이는 입양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민간 보육원으로 보내졌던 셈이다. 현행법상 베이비박스 유기아동이 발생하면 지자체장은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성본창설을 하고, 보호대상 아동에 대한 사례결정위원회를 열어 아동의 보호조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런 실상은 2019년 감사원의 감사에서도 지적됐다. 2014~2018년 사이 베이비박스 유기아동의 시설보호율(929명, 96.6%)이 가정보호율(33명, 3.4%)을 압도했다. 또 시설로 보호조치 된 후 가정보호로 변경된 아동은 128명(13.8%)에 그치는 등 대부분(748명, 80.5%)의 아동은 아동복지시설에서 장기 보호되고 있어 ‘아동의 가정보호 최우선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유기 아동 ‘가정 양육’ 원칙인데 ‘폭탄돌리기’

전국입양가족연대 관계자는 “사실상 공적 책임이 사적 책임으로 전가돼 온 것”이라며 “공공은 모든 책임에서 손을 떼고 아동의 운명은 보육원장에 의해 좌우돼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보호체계가 10년 이상 지속된 이유는 손쉽게 공적 책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두 아이를 입양한 국민의힘 김미애 의원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김 의원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1차적으로 부모에 의한 방임이 문제라면, 2차는 국가와 사회의 방임”이라며 “폭탄돌리기처럼 아이들을 여기저기로 보내고, 시설로 간 이후론 ‘내 눈에서 벗어나면 끝’인 관행이 멈춰야 한다. 건강한 가정에서 양육되도록 하는 게 아동보호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이날부터 베이비박스 관할 지자체인 관악구청에서는 성본창설 절차에 들어가며, 사례결정위원회를 열어 대상 아동의 최종적인 보호경로를 확정한다. 위탁 가정은 아동의 성본창설 기간 동안 위탁을 맡게 되며, 길게는 6개월간 아이와 함께하게 된다. 이번 사례를 시작으로 현재 아동 위탁을 희망하는 3개 가정이 대기 중이라고 한다.

지난 2월 당시 서울시장 보궐선거 국민의힘 오세훈 예비후보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사랑공동체 교회가 운영하는 베이비박스를 방문, 이종락 목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가정위탁 추진, 오세훈 시장 취임 후 급물살

2012년 입양특례법 시행 후 의무적인 출생신고제로 인해 베이비박스 유기 아동이 증가했다는 분석도 있다. 입양 기관에 아이를 맡길 때 반드시 친부모 또는 미혼모가 출생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신분 노출을 우려해 베이비박스 아동이 늘었다는 것이다. 반면, 베이비박스 설치 자체가 아동 유기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베이비박스 아동은 2010년 4건, 2011년 37건, 2012년 79건이었고 입양특례법 시행 이후인 2013년 252건으로 늘었다.
 
전국입양가족연대와 김미애 의원은 베이비박스 아동들이 보육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가정위탁을 추진해왔다. 지난해 11월 입양 가족들이 모여 “우리가 중간에서 위탁해서, 성본창설이 될 때까지 보육하겠다. 성본창설이 되면 그 아기를 입양기관에 넘겨서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제안했으나 좌절됐다. 
 
유기 아동의 가정위탁 추진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건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다. 김 의원은 지난 7월 19일 오 시장과 만나 이 같은 이야기를 나눴고, 유기아동 가정보호 조치에의 협력을 약속받아 이번 위탁가정 연계까지 이어지게 됐다.
 

“위탁가정 턱없이 부족”

그러나, 유기 아동의 위탁가정 연계는 녹록치 않은 게 현실이다. 국내에서는 아동 2만 6000명이 보육원에서 자라고 있으며, 장기 가출청소년 3만명까지 합하면 총 6만 위탁가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국내 아동의 위탁을 맡은 가정은 900곳이며, 그중 800가정은 조부모 등 친족이 아동을 맡는 ‘연고 위탁’으로 무연고 위탁 사례는 턱없이 적다. 
 
이날부터 생후 12일 된 아이를 위탁하게 된 오창화 대표는 “아이들의 가정보호는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의 동일 원칙”이라며 “아이들은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한다. 부모와의 교감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는 걸 배우게 된다. 위탁의 경우 3살 미만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위탁 가정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유기 아동 위탁에 동참했으면 한다”며 “아이들은 가정에서 자라는 게 맞다. 위탁가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국가적으로 훈련 등이 지원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