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아침에도 소나기가 내렸다. 나는 비옷을 입고 밭으로 나갔다. 옆 밭에는 구순의 할머니가 나보다 먼저 나와 계셨다. 호박잎과 콩잎을 따고 계셨다.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는 손에 쥔 호박잎과 콩잎을 나눠 내게 건네셨다.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에 이사를 와서 살면서, 말하자면 나는 시골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내 고향인 경북 김천 산골에서 살았던 생활을 여기서 다시 하게 된 셈이다. 나는 요즘 장전에 사는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곤 한다. 검게 탄 얼굴에 마른 몸의 외관이니 밭일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는다.
처지 헤아려 돕는 마음이 곧 인심
너그러운 인심 공동체 시골살이
인심 얻을 일도 함께 생각하게 돼
비록 여름날의 풀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지만, 시골의 후한 인심만은 받으며 살고 있다. 구순의 할머니는 얼마 전 밭에서 일하고 있는 내게 수박 한 조각을 갖다 주시겠다며 집으로 들어가시더니 평소에 밀고 다니시던 유모차에 수박 세 덩어리를 실어 밀고 오셔서 내게 주셨다. 뒷집에 사는 형님은 귤나무에 농약을 치다 남은 농약을 내 귤나무에도 뿌려주셨다. 가끔은 이웃들과 탁주를 한 잔씩 나눠 마시기도 한다. 제때에 심어야 할 작물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어떻게 가꿔야 하는지, 땅의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시골살이가 서툰 내게 틈이 날 때마다 가르쳐준다. 심지어 꿩이 밭에 낳아놓은 작고 뽀얀 꿩알 두 개를 내 손에 쥐여주신 분도 계셨다.
나는 이 후한 인심을 받으면서 내 어릴 적 큰어머니 생각이 났다. 큰어머니는 이따금씩 우리 집에 들르셔서 밥 짓는 솥뚜껑을 열어 그 가운데에 먹을 것을 놓아두고 가시곤 했다. 어머니께서는 저물녘에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지으려고 솥뚜껑을 열어 보고선 뭉클해져서 큰어머니가 갖다 놓고 가신 것들을 한동안 바라보시기만 했다.
시골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뭘 사러 가려면 한참 나가야 하고, 버스를 타려면 버스 다니는 게 뜸하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춰나가야 한다. 밤이 시작되면 마을 사람들의 활동이 뚝 끊어지고 날이 밝아오면 마을 사람들의 활동이 곧바로 바빠진다. 게으름을 즐길 시간이 많지 않다. 이웃해 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선의의 말을 하려고 애쓴다.
오규원 시인이 쓴 ‘사람과 집’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마을 내 각각의 집들을 호명한다. ‘김종택의 집을 지나 이순식의 집과 정진수의 집을 지나 박일의 집 담을 지나 이말청의 집 담장과 심호대의 집 담장을 지나 박무남의 집 담벽과 송수걸의 집 담벽과 이한의 집 담벽을 지나 강수철의 집 벽과 천길순의 집 벽을 지나(후략).’ 시인은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산다는 것을 표현한 것일 테다.
이처럼 나도 시골에서 어울려 살고 있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다시 시골로 오니 사람들이 훨씬 가까워졌다. 집집의 살림 사는 소리가 돌담을 넘어온다. 아울러 인심도 넘어온다. 물론 나도 인심을 살 일도 절로 생각하게 된다. 구순의 할머니는 내일 아침에도 나보다 일찍 일어나셔서 무화과나무 아래서 풀을 뽑거나 호박잎과 콩잎을 따거나 흰 꽃이 지고 있는 깨밭에 나와 계실 것이다. 그러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