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당 이름 쓰려했는데…북측 “본사 연계 감춰라” 막아

중앙일보

입력 2021.08.10 00:02

수정 2021.08.1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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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은 인터넷 언론사 대표가 운영하던 매체. [홈페이지 캡처]

북한의 지령을 받고 미국산 스텔스 전투기 도입 반대 활동 등을 벌인 혐의(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등)로 조직원 4명 중 3명이 구속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충북동지회)가 원래 ‘조선노동당 자주통일 충북지역당’이라는 명칭을 쓰려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중앙일보가 9일 입수한 국가정보원과 경찰 국가수사본부의 구속영장 신청서에 따르면 구속된 충북동지회 고문 박모(56)씨는 2017년 5월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문화교류국(옛 225국) 공작원 조모씨를 만나 “충북 지역에 북한의 전위 지하조직을 결성하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왔다. 문화교류국은 조선노동당 산하 통일전선부 대남공작 부서로 한국의 시민·노동 단체 인사 포섭을 통한 남한 내 지하당 건설과 이를 통한 국가 기밀 수집 및 북한 체제 선전 활동을 목표로 한 조직이다.
 
영장 신청서에 따르면 박씨 등은 같은 해 6~7일 ‘조선노동당 자주통일 충북지역당’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북한은 이들의 조직명 사용 요청을 불허했다. ‘조선노동당’과의 연계 정황이 드러나선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북한은 “본사(북한)와의 연계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도록 심중(深重)히 표현들을 선택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선노동당’이라는 표현을 이용해선 안 된다”고 지침을 내렸다.

충북동지회 구속영장 신청서 보니
압수수색 뒤 암호보고 어려워지자
인터넷 언론 통해 대북보고 정황
피의자 “짜맞추기 수사” 정면 반박

북한이 2017년 충북조직원에 보낸 지침

이에 따라 이들은 같은 해 8월 13일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결성했다. 이어 이틀 뒤인 8월 15일 ‘충북동지회 결성대회 정형’(‘상황’의 북한식 표현)이란 제목의 대북 보고문을 만들면서 “영명한 우리 원수님! 만수무강하시라!”(박씨), “위대한 원수님의 영도, 충북 결사옹위 결사관철”(윤모씨),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원수님과 함께”(또 다른 박모씨), “원수님의 충직한 전사로 살자”(손모씨) 등 김정은(조선노동당 총비서) 위원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血書)를 적어넣었다.
 
국정원 등은 또 이들이 손씨가 운영하는 지역 인터넷 신문에 기사를 올리는 방식으로 북한에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압수수색 이후 ‘스테가노그래피’ 프로그램 등 암호화 프로그램을 이용한 대북 보고가 어려워지자 이런 방식을 취했다는 게 국정원 등의 의심이다. 국정원 등은 영장에 “신문을 통해 수사관 실명, 소환 일자, 장소 등을 사진과 함께 게재하며 수사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북한에 혐의 내용과 북 공작원 신원 노출 사실을 보도 형식으로 알려줌으로써 공작원 신분에 대한 구실 마련 등 증거 인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적시했다.
 
이들은 지난해 총선 한 달여 전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 위원장(국회의원) 측을 접촉한 뒤 그 결과를 북한에 보고하기도 했다. 북한이 지난해 2월 10일 “총선 투쟁에서 반(反)보수 투쟁의 도수를 높일 대책을 강구하자” “본사(북한)에서 보낸 활동 방향에 준해 회사(동지회)의 총선 투쟁을 현실성 있게 작성해 보고하라. 총선 관련 여야 세력의 동향과 자료도 보고하라”는 취지의 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실제 같은 달 10일 손씨 등 조직원 3명이 민주당 충북도당(모 의원실) 관계자를 만나 선거 전략과 ‘반보수 민주대연합’ 방안, ‘사회대개혁 정책연대’ 참여 여부 등을 문의했다. 하지만 민주당 도당 관계자는 “F-35A 도입 반대나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는 수위가 높아 정치 의제화가 어렵다”고 이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해당 의원실 측도 “악성 민원인들이 반복적으로 연락해 와 한 번 만난 뒤 제안을 거절한 게 전부”라고 선을 그었다.


이들은 북한 지령에 따라 통일밤묘목 보내기 운동을 펼치며 2019~2020년 민주당 중진 의원 및 민화협 고위 관계자 등 여권 인사를 접촉한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국정원 등이 확보한 보고문과 지령문 등에 포섭 대상 등으로 언급된 인사는 민중당(현 진보당) 중앙당 및 충북도당 간부, 노동·환경 부문 시민운동가 등 총 60명에 이른다.  
 
이들은 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검찰 수사 본격화와 관련해 “반보수 투쟁을 하기 위해 ‘사법적폐 청산, 검찰개혁 범시민연대’를 1월 중순까지 결성하겠다”고 2019년 12월 북한에 보고하기도 했다. 영장신청서에 따르면 북한은 조 전 장관 사퇴 6일 뒤인 같은 해 10월 20일 ‘조 장관 사퇴로 인해 동요하는 중도층 쟁취 사업’을 지령으로 내렸다. 북한은 조 전 장관 사퇴를 “검찰개혁에 도전해 나선 보수세력의 기획적인 재집권 책동”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수수방관한다면 중도층도 그 피해를 면치 못한다는 것을 널리 여론화한다”고 투쟁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들은 수사 내용을 정면 반박했다. 손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 및 의견서를 통해 “동지회는 공안기관이 조작한 유령 조직이며 우리가 접촉했다는 북한 공작원 3명 역시 실재하지 않는 가공된 인물”이라며 “이 사건은 조작의 전형이자 짜맞추기식 수사와 불법 사찰을 통한 불법 취득물의 결과”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