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구속영장 신청서에는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판문점 선언’에서 적대행위 중단을 선언한 이튿날 캄보디아에서 북한 공작조와 접선해 “군부대 정보 수집” 지령을 받았다는 내용도 담겼다. 국가정보원과 국가수사본부가 지난 5월 27일 압수한 휴대용 저장장치(USB) 안에서 이들이 북한 공작원과 주고받은 지령문과 대북 보고문·혈서 등 84건을 찾아내면서다.
‘충북동지회’ USB 혈서·지령·보고 84건 내용은
“적대중단” 판문점선언 이튿날 北공작원 “군부대 정보수집” 지령
혈서는 구속된 A씨가 지난 2017년 5월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 조모씨를 만나 “충북지역에 북한의 전위 지하 조직을 결성하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온 약 석 달 뒤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충북동지회)’를 결성한 직후 썼다고 한다. 이들은 같은 해 8월 13일 청주 모처에서 조직을 결성하고 8월 15일 ‘충북동지회 결성대회 정형’(상황)이란 제목의 대북 보고문에 혈서 사진을 함께 보고했다.
수사기관은 영장 신청서에 북한의 ‘지하당 공작’의 일환으로 합법정당 민중당 내부 동향(국가기밀)을 수집해 보고한 간첩 혐의를 포함해 ‘충북동지회’관련 혐의를 낱낱히 기술했다. 이에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4조), 금품수수(5조), 잠입탈출(6조), 찬양고무(7조), 회합통신(8조) 혐의 등을 모두 적용했다.
A씨가 베이징에서 북한 공작원과 만난 건 앞서 이들 4명이 2017년 대선 직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노동특보단 명의로 문 후보 공개 지지 선언(5월 4일)한 17일 뒤, 문재인 대통령 당선(5월 9일)으로부터는 12일 후였다.
문 정부 출범 한 달 뒤(2017년 6월 24일)에는 북한으로부터 “진보운동 세력이 문재인 정권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좌왕우왕(우왕좌왕)하고 있다”며 “추진 중인 사업들을 구체적으로 보고해달라”는 지령문을 받았다.
이듬해 4월 27일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적대행위 전면 중지’ 등 판문점선언을 채택한 다음 날인 4월 28일 B씨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북한 공작원 리모씨와 조씨 등을 만나 ‘충북위수사령부 37사단 정보수집’ ‘모 대기업 사업장 현장 재침투’ ‘내국인 신원정보 수집’ 등 지령을 받고 5월 1일 국내에 다시 잠입한 것으로도 조사됐다.
北지령문 “민중당 강화·발전” 60명 포섭대상 언급…‘간첩죄’ 적용
충북동지회는 ‘수령방침의 혁명적 관철’ 등 이른바 북한의 3대 혁명규율을 준수하는 등 북한 문화교류국의 지하당 조직 운영체계와도 유사하다는 것이 국정원 등의 수사 결과다.
특히 이들 전원에 ‘간첩죄’로 불리는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혐의(4조)도 적용했다. 합법정당인 민중당의 의사결정 과정 등 내부 동향을 탐지‧수집하고 민중당 및 시민단체 간부 등 ‘포섭대상자’로 지목된 이들의 신상을 파악해 북한에 보고했기 때문이다.
실제 민중당 충북도당 간부 2명의 구체적인 신원 및 사상 동향을 보고하는 등 지령문·보고문에 포섭대상 또는 통일전선 대상으로 언급된 내국인만 약 60명에 이르고, 이중 북한이 직접 포섭을 시도한 인물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이런 민중당 내부 동향 및 간부 동향 보고는 “대한민국의 안전에 직·간접적인 위험이 초래될 수 있는 국가기밀에 해당한다”는 게 국정원 등의 판단이다. 지극히 한정된 사람만 알고 있는 정당 내부 정보나 인사들의 개인정보를 북한이 인지할 경우 대남공작의 전략‧전술을 수립하는데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은 이같은 대북 보고문이 북한 문화교류국이 지난 2018년 충북동지회에 “민중당을 강화 발전시켜야 한다”, “민중당 안에 산하당 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을 면밀히 하라”는 취지의 지령을 이행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영장 신청서에는 2020년 4월 5일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총선의 기본 목표를 친미우익 보수세력을 확고히 제압하고, 진보민주 개혁세력이 압도적 승리를 이룩하는 것과 함께 합법적 진보 정당인 민중당의 조직 사상적‧대중적 지반을 더욱 공고히 다지며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 확대해나가는 것”이라고 적힌 암호화 파일을 받은 내용도 나온다.
“휴대폰 바꾸고, 은어로 메모해라” 北 보안수칙 하달
국정원 등은 이를 “그동안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분량”이라고 강조했다.
수사기관은 이들의 범행이 ‘은밀성’을 최우선 원칙으로 이뤄졌다고 봤다. ▶중요 내용은 은어로 메모하고 철저히 삭제 ▶교체주기는 컴퓨터 3년, 메일‧모뎀‧심카드 6개월 등으로 보안 수칙까지 북한에서 하달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를 ‘신사장’(손모씨), ‘A사장’ ‘B사장’ ‘C부장’ 등으로 부르면서 대북 통신용 암호화 프로그램인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 프로그램을 이용해 북한 문화교류국과 연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령문·보고문 파일(docx)들을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C씨가 2019년 11월 중국 선양에서 공작금 2만달러(한화 약 2270만원)를 받을 때도 무인함을 이용하고 동선에 아들 학업 관련 상담 절차를 추가하는 등 감시망을 피하려 애썼다는게 수사기관의 판단이다. B씨가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고 돌아온 뒤인 2018년 6월과 8월 C씨가 서울 명동 사설 환전소에서 별도로 2만 달러를 환전한 사실을 확인해 추가 공작금을 수령한 것으로도 의심하고 있다.
국정원 등은 4명 중 A씨 등 일부는 10~15년 전부터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공작부서인 문화교류국(옛 225국) 공작원과 접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들이 2000년대 초부터 각각 중국만 10~35회 오가는 등 중국을 집중 방문한 사실 역시 문화교류국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의심한다. 이들과 접촉한 공작조 선임인 리모(61)씨는 1990년대 수차례 국내에 침투한 공로로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손씨 “충북동지회, 유령 조직…北공작원도 가공 인물”
그는 목적수행 혐의를 받는 민중당 내부 동향 보고에 대해서도 “민중당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된 활동이기 때문에 국가기밀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