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잉태는 익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무대응이다. 백신도 없던 엄혹한 때에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은 오로지 마스크였다. 그건 틀림없다. 코와 입을 가리는 마스크의 ‘익명성’은 코로나19로 인해 ‘안전성’으로 거듭났다. “우리를 위해 마스크를 써주세요. 우리도 당신을 위해 마스크를 쓸게요”식의 캠페인은 인류의 상호의존성이 그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역설한다. 부정과 억압의 마스크는 이제 ‘함께 살자’의 상징이 되었다.
팬데믹 건너 유토피아 전 단계
모두 마스크 쓰는 마스크피아
마스크 너머 불평등한 일상은
온전히 정부의 책임이라 할만
이러한 마스크를 모든 시민이 너 나 할 것 없이 쓰고 있는 것은 지극히 평등하다. 그러나 마스크 너머 시민의 일상도 평등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주어지는 재난지원금만으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목표하는 평등은 물질적 조건의 평등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적·도덕적 조건의 평등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에겐 마스크는 불편함의 전부이지만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겐 생존의 억압임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4차 대유행을 막아서는 힘은 반듯한 마스크 착용이며 온전한 거리 두기, 그리고 백신 접종뿐이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팬데믹의 강을 건너 서로의 체온이 따뜻한 유토피아를 가기 위한 전 단계, ‘마스크피아’에 극성스럽게 천착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신 접종 선진국들도 다시 마스크를 쓰고 있다.
늘 그랬듯이 우리 시민의 능동적 참여는 충족될 것이다. 그러나 마스크 너머 불평등한 시민의 일상은 온전히 정부의 책임이다. 통제가 길어지면 축축한 그늘이 드리운다. 채 살피지 못한 사람들의 움츠러든 마음에 햇살이 깃들도록 하는 일, 그건 재난지원금의 비율과 액수가 아닌 국민 일상에 대한 정부의 진정성이다. 여기엔 여야가 따로 없다. 있어서도 안된다.
답답한 마스크를 쓴 채 속절없이 여름을 지나간다. 찜통더위에 마스크를 낀 것만으로 올여름은 충분히 잔혹하다. 여름의 향기가 분명한 아카시아에 대한 기억도 이젠 가물거린다. 모든 것들의 관계를 막아서는 몹쓸 감염병, 이 혼돈의 시대는 다시 모든 것들의 유실의 시간들이다. 마스크 너머 사람들, 공감의 눈빛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무방비의 결과들이 길어지면서 때론 그 눈빛들이 서글프다. 작금의 위기를 넘어서기엔 여전히 인류의 힘은 모자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그 답을 찾을 것이다. 나만을 위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