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만 입고 두만강 세 번 건너온 탈북 엄마의 소원[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27 08:00

수정 2021.08.2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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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들이 길을 걷습니다. 서로 자연스레 손을 잡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삶의 길, 손을 맞잡고 함께 가기를 엄마는 늘 바랍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녕하세요.

저는 2009년 한국에 입국하여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오십 대 중반 아줌마예요.
중앙일보 페이스북에서  
‘인생 사진 찍어드립니다’를 보고 연락드립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엄마 정이 그리워 한국 온 지 6년 된
저의 아들이 9월 7일 입대를 한답니다.
아들이 군에 가기 전,  
아들과 의미 있는 사진 한장 남기고 싶고,
또 살아온 사연을 남기고 싶어 응모합니다.
제 이름은 김경화입니다.

중국서 태어난 아들, 군대 가는 사연
아들과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여행'
"내 인생 슬픔의 제일 끝머리 희망은 아들"

 

모자가 물총을 들고 군인처럼 포즈를 취했습니다. 엄마는 아들이 모쪼록 건강히 군 생활하기만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보내온 사연이 아주 짧았습니다.

짧은 데도 몇 가지 실마리에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2009년 한국 입국,  
중국에서 태어난 아들,  
아들의 입대,
남기고 싶은 사연 등에
차마 글로 다 쓰지 못한 사연이 있을 듯했습니다.
 
일단 모자의 인생 사진을 찍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진 찍는 날 만나  
다 쓰지 못한 사연을 들어볼 요량이었습니다.
 
만나기 전 문자로  
아들과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김경화 씨에게 물었습니다.
‘여행’이라는 답이 왔습니다.


같이 사진을 찍자는 엄마의 요청에 아들은 아무 말 없이 따라 나와 줬습니다. 아들이 내색을 잘 안 하지만, 늘 엄마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준다며 엄마가 살짝 자랑했습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진의 컨셉을 여행으로 하기로 하고
용인 한국민속촌으로 장소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모자의 여행을 위한 
일일 사진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한국민속촌으로 함께 가면서
우선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입대하는 이유가 뭔지 물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이인 열일곱살에 한국에 왔어요.
중국 아이인데 한국에 와서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아들이 우리 중국 교포가 아니고 중국인입니까?”
 
“네 맞아요. 중국인 남편에게서 난 중국 아이예요.
그러니 말과 글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학교 가기 전 어학원부터 다녔죠.
민족, 문화, 언어 다 바뀌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말 안 해도 다 알죠.  
얘가 힘들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지만 다 느껴지죠.
적응 못 할까 너무 걱정했는데,
다행히 학교도 잘 다니고 잘 적응했습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한국 문화에 잘 적응했습니다. 힘들다는 내색 한마디 없이 잘 적응해준 아들이라 엄마는 더 대견해 합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럼 입대하는 걸 보니 우리 국적을 취득하셨나 보죠?”
 
“네. 국적도 얻고 제 성을 따 
김정효라는 한국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인데 또래보다 좀 늦었지만, 
곧 군에 입대합니다.
아이가 일곱 살 때,  
제가 잡혀가서 거의 10여년 보살펴 주지 못했는데,  
그래도 엄마라고 찾아와주었으니 
늘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엄마는 한국에 와서 시간만 나면 도서관에 갔습니다. 한국에 왔으니 한국 문화에 자연스레 녹아들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엄마는 중국에서 난 아들이지만 자연스레 한국 문화에 녹아들기를 바랍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이가 일곱 살 때 잡혀갔었다고요? 대체 무슨 일로?”
 
“아, 제가 두만강을 세 번 건넜습니다.”
 
“그럼 중국 교포가 아니고 탈북민이십니까?”
 
“네 맞아요. 처음 건넜을 때가 1996년 12월인데,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슴팍까지 오는 살얼음 언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며 하필 신발을 잃어버렸죠.  
맨발로 서너 시간 걸었으니 
온 발에 동상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강을 건넜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그런데 왜 세 번이나 두만강을?”
 
“2004년에 한 번, 
2006년에도 한 번 잡혀서 북송되었습니다. 
도강 죄였죠.”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연이 봇물 터지듯 이어집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생각조차 못 했던 사연입니다.
 
“잡혀 들어가면 큰 곤욕을 치르지 않습니까?”  
 
“처음엔 용서하라는 지침이 있어 무사했는데,  
두 번째는 엄벌하라는 지침에 
빵에 거의 10개월,
노동단련대에 1년 있으며 고생 좀 했습니다.
두 번째 잡혀갈 때는 얘가 자고 있었어요.
졸지에 엄마가 없어졌으니 
기도 못 펴고 자랐을 겁니다.”
 
이때 옆에 있던 아들이 한마디 했습니다.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참 과묵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도 바로잡고 싶은 기억이었나 봅니다.
 
“엄마가 잡혀갈 때 깨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불장 밑에 숨어있던 엄마가 
잡혀가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억의 간극,  
그간 서로 떨어져 살았던 만큼,
서로를 돌볼 여력이 없을 만큼,
그만큼이 기억의 간극을 만든 겁니다.
 

엄마는 요즘 새로운 꿈을 꿉니다. 그것은 아들이 제대하면 함께 해외 여행가는 꿈입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엄마 김경화 씨는 아들이 내성적인 게  
모두 어릴 때 살펴 주지 못한 
당신 탓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이 말 없는 아들이 언젠가 엄마와 다툰 후, 
이런 말을 했답니다.
 
“어릴 때 못 키워줘서 저한테 잘해주는 거 다 알아요.  
엄마처럼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엄마가 내 엄마라서 고맙습니다.
이제 덜 신경 써 주시고,
그냥 지켜 봐주시면 됩니다.”
 
이 말끝에 “엄마 사랑해”라며 
아들이 엄마를 안아 주었답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며  
엄마 김경화 씨가 제게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 슬픔의 제일 끝머리에 있는 희망,  
그것이 바로 제 아들입니다.”
 

거리 두기 4단계이며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타는 사람 없는 놀이기구를 모자가 탔습니다. 그렇게 같이할 추억을 하나 쌓았습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