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예영준의 시시각각] 그들 모두가 드루킹이다

중앙일보

입력 2021.07.2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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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킹 댓글 여론조작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된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26일 오후 창원교도소 앞에서 재수감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 송봉근 기자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 수감됐다. 선거 여론 조작은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범죄다. 당사자가 결백을 호소한 것은 형사피고인이 갖는 자기방어권의 영역일 수 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여당 의원과 진보진영 인사들이 대법원 확정판결에 불복하며 김 전 지사를 두둔했다. 여권 지지층에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방송인은 육두문자로 재판부를 비난했다. "내 사전에 민주주의란 없다"고 커밍아웃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직 나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믿는 세력, 그래서 남을 제압하고 내가 이기는 것만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확신하는 자들에게 이기기 위한 방법과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이길 선거,뭐가 문제냐”는 적반하장이나 “작은 조작일 뿐”이란 반응은 그런 사고구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위기의 반영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또 다른 드루킹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하지만 굳이 번거로운 컴퓨터 기술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에선 지금 이 시간에도 여론 조작이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언론사 기자치고 댓글 표적이 돼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정치권이건, 그 외곽이건 이름깨나 있는 사람이 한마디 하거나 페이스북에 유감의 뜻을 한 줄 올리기라도 하면, 혹은 그들만의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특정 기사의 링크를 공유하면, 우루루 몰려든 익명의 개인들에 의한 댓글 융단폭격이 이뤄지는 건 삽시간이다. ‘좌표찍기’라 불리는 이 방법은 이미 고전적 기법에 속한다. 조직적이든 자발적이든, 대가가 있건 없건 수많은 드루킹 상비군(常備軍)들이 언제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   

민주주의 근간 파괴하는 여론조작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독단과
수단방법 안가리는 사고방식의 산물

그들의 활동은 때로는 합법적 정치행위와 맞물려 일어난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 사건에 대한 파일들을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그 직후부터 진위를 알 수 없는 ‘X파일’들이 우후죽순처럼 디지털 공간에 출몰했다. 킹크랩을 돌리지 않아도 자발적 퍼나르기와 댓글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퍼진 것이다. 고약한 것은 당사자가 해명할수록 오히려 함정에 빠져든다는 점이다. 이건 송 대표가 의도했거나 예견했는지 여부와도 상관이 없고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닭갈비’ 알리바이를 대며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반론할 필요도 없다. '이재명 녹음파일'은 진위가 명백하다는 점에서 '윤석열 X파일'과 차이가 있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유포되는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청해부대 집단 감염사태는 청와대·정부·군 할 것 없이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청와대 참모는 태연자약하게 “공중급유수송기 동원은 대통령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여론 조작의 세계, 즉 거짓말의 세계에서는 조작 대상인 대중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친다. 
 
임대차법 개정 때문에 그 자신 ‘전세난민’이 됐던 홍남기 부총리는 “임차인들의 주거 안정성이 개선됐다”고 했다.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게 뛰어올라버린 전셋값 때문에 도심에서 변두리로, 서울에서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나며 직주격리(職住隔離)를 강요당하고 있는 현실을 덮으려 한 것이다. 자화자찬이 중증에 이른 것이 주된 원인인지 모르지만, 여론 조작 의존증이란 합병증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현상의 한쪽 단면만 보여주며 전체를 덮으려는 것은 아주 오래된 여론 조작의 수법 중 하나다. “거짓말도 백번 하면 진실이 된다”는 괴벨스 이래의 경험칙에 중독된 결과일 수도 있다.  


IT 지식을 동원해 매크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돌리는 것만이 여론 조작이 아니다. 때로는 디지털 공간을 유령처럼 배회하면서, 때로는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면서 조작된 여론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 그들이 모두 드루킹이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