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가면 보인다, 혐오 대신 함께하는 세상

중앙일보

입력 2021.07.22 00:03

수정 2021.07.22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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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위치한 포도뮤지엄.

제주의 안쪽은 조용하다. 도시와 해수욕장이 자리 잡은 해안 쪽과 달리, 한라산 주위 중산간(中山間) 지역은 인위적인 발길이 잦지 않다. 대신 완만하게 솟은 오름, 변화무쌍한 구름, 한 줄기 햇살이 자연의 오묘함을 뽐낸다.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은 그런 중산간 지역에 세워진 2층짜리 문화공간. 건물은 적막한 자연 속에 덩그러니 서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엄중해 입장 인원을 시간당 80명으로 제한하고 방역 고삐를 죄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4월 24일 문을 연 뒤 석 달도 안 돼 2만 2000명 넘게 다녀갔다. 평일에도 200~300명씩 발길이 이어져 제주 내에서도 조용한 화젯거리다.

한라산 중턱의 포도뮤지엄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전시
석달간 2만명 넘게 다녀가

남의 말을 옮기며 소문을 퍼뜨리는 빨간 앵무새.

전시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첫 번째 전시는 우리가 지닌 편견과 오해, 누군가에 대한 험담과 혐오가 얼마나 큰 상처와 비극을 낳는지 일깨우는 ‘너와 내가 만든 세상’. 중세 마녀사냥부터 죄 없는 양민에 대한 탄압, 유대인 대학살, 현대의 각종 자극적인 정보와 선동까지, 편견과 혐오가 시작되고 퍼져나가 파괴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편견과 혐오는 바이러스처럼 국경을 넘나든다. 한·중·일 작가 8명이 참여한 작품들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양쪽에 늘어선 새빨간 앵무새들은 끝없이 소문을 옮기는 사람들은 상징한다. 벽에 다가서면 내 그림자의 크기만큼 다양한 혐오 발언들이 나타나는데, 누군가 옆에 서면 그림자 면적이 넓어지면서 더 많은 발언이 나타난다. 편견과 혐오는 이렇게 커진다.
 

혐오의 상처를 드러낸 ‘벌레먹은 숲’.

전시장 내부는 높고 넓다. 나무와 과일이 가득한 숲을 연출한 공간은 자세히 보면 벌레에 갉아 먹혀 떨어져 나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한국 사회에도 특정 직업이나 성별, 연령대를 비하하며 ‘○○충’이라고 부르는 말이 퍼져있다.


제주에 사는 김태희(45)씨는 “코로나 탓에 거리를 두고 살다 보니 더욱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워졌다”며 “중3과 고3 두 아들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해 주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2층 전시는 관람객을 100년 전으로 데려간다.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작품들이 차분한 조명 아래 걸려있다. 세계대전에 아들·손자를 잃은 비극적 어머니이자 독일의 판화가로서 한국에도 꽤 알려진 작가다.
 

얼굴이 가려져 개성과 판단을 잃어버린 ‘익명’.

전시 제목은 “아가, 봄이 왔다”. 1919년 2월 6일 그가 일기에 적은 글귀다. 작품마다 자식을 향한 슬픔과 모성애가 조용히 눈물처럼 흐른다. 두 아이를 온 힘을 다해 껴안은 여인의 조각, 앙상하고 거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아버지와 그 팔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판화 앞에선 가슴이 먹먹하다. 콜비츠가 겪었던 삶의 비극 역시 전쟁이라는 혐오와 왜곡된 적대감의 역사적 증거다.
 
내년 3월 7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코로나 시대 공존의 가치와 소중함을 나누기 위해 기획됐다. SK의 공익법인 티앤씨재단이 주최하고 김희영 재단 대표가 전시 기획을 총괄했다.
 
최단비 포도뮤지엄 학예연구팀장은 “사람들에게 한 번쯤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며 “앞으로도 보편적 인류애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뤄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