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 역공에 "유감"이 끝이었다, 한일회담 결국 파투

중앙일보

입력 2021.07.19 19:23

수정 2021.07.1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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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일 양국이 막판까지 압박과 버티기를 거듭한 결과는 ‘정상회담 파투’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19일 오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한 문재인 대통령의 방일이 무산된 데 대해 “양측 간 협의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돼 상당한 이해의 접근은 있었지만, 정상회담의 성과로 삼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며, 그 밖의 제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성과 미흡’은 정상회담이 열려도 양국 간 갈등 현안에서 진전된 합의를 도출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 밖의 제반 상황’은 소마 히로히사(相馬弘尙) 주한 일본 대사관 총괄공사의 문 대통령 비하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문 대통령이 일본에 가지 않기로 한 주된 이유는 ‘성과 없는 방일’에 대한 부담이었던 셈인데, 그 와중에 망언 악재가 터진 것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국내적으로 끓어오르는 반일 정서를 무릅쓰고 방일을 강행하려면 갈등 현안에서 그만한 성과가 담보돼야 하는데, 결국 여기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궁극적인 목표는 관계 복원이었지만, 아직 더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이견을 좁히기는 했지만 충분치는 않았다는 취지로 해석 가능하다.
 
앞서 양국은 이날 오전까지도 기싸움을 이어갔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23일 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개최가 확정됐다며 회담 장소까지 보도했는데, 청와대는 곧바로 반박했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19일 한일 양국 정부는 도쿄올림픽 개막일인 오는 23일 도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첫 대면 정상회담을 열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요미우리 신문의 기사. 뉴스1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현재 양국이 협의하고 있으나 여전히 성과로서 미흡하며, 막판에 대두된 회담의 장애에 대해 아직 일본 측으로부터 납득할만한 조치가 없는 상황이어서 방일과 회담이 성사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밝혔다.  
 
일본을 향해 현안에서의 진전과 소마 공사에 대한 조치를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조건으로 건 것이다. 망언 사태가 한국의 '역공 카드'가 된 모양새였다.  
 
직후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일본 관방장관이 소마 공사의 발언에 대해 “외교관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며 유감을 표했다. 이틀 전만 하더라도 관련 질문에 “사안의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대사가 주의를 줬다고 들었다”고 답했는데, 이보다는 진전된 입장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관방장관이 매우 유감스럽다고 발표한 것에 주목한다”며 “일본 정부는 적절한 후속 조치를 조속히 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긍정적 의미를 담은 ‘평가한다’가 아닌 ‘주목한다’는 중립적인 표현이었다. 외교적으로 주목한다는 말은 ‘알고 있다’ 정도의 의미다. 그러면서 후속 조치를 언급한 건 일본이 유감 표명 이상의 유연성을 보이지 않은 데 대한 청와대의 불편함이 드러난다.  
 
소마 공사의 부적절한 발언이 유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현안에서 양보할 생각은 없다는 게 일본 입장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청와대는 오전 발표 입장에서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썼던 “여전히 성과로서 미흡하다”는 표현을 오후 문 대통령의 방일 무산 발표 입장에서 똑같이 다시 썼다.
 
사실 양국은 갈등 현안에 대한 접근법에서부터 견해차가 컸다. 한국은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 등 과거사 ▶일본의 수출 규제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등 3개 현안 중 하나라도 성과를 내야 정상회담을 하는 의미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수출 규제의 경우 2019년 11월 이미 양국이 대화를 통해 이를 해제하는 방향으로 협의하자고 합의한 터라 정상급에서는 이보다 진전된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어려운 현안들을 서로 분리해 하나씩 해결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일본은 강제징용 문제에서 한국이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않으면, 수출 규제도 철회하기 어렵다는 쪽이었다. 한국과 반대로 현안을 서로 연계하며 ‘결자해지’라는 식으로 한국에 공을 넘기는 모양새였다.
 
또 한국은 최고위급 외교 협의가 이뤄지는 만큼 정상 간 ‘통 큰 결단’을 통해 복잡하게 얽힌 갈등의 매듭을 끊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일본은 실무선에서 먼저 차근차근 협의를 진행해 어느 정도 접점을 형성한 뒤에 정상들이 만나는 게 순서라는 입장이었다. ‘탑다운 대 바텀업’으로 근본적 인식차가 있었다.
 

도쿄올림픽 개막을 나흘 앞둔 19일 대한민국 선수단이 머물고 있는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 선수촌의 모습.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양국의 국내적 변수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문 대통령에게 국내적 반일 정서가 변수였다면, 스가 총리는 도쿄 올림픽 강행으로 촉발된 지지율 하락이라는 국내적 변수가 있었다.  
 
일본 외교가에서는 총리 지지율의 마지노선을 30%로 보는데, 16일 지지통신 조사에서 스가 총리의 지지율은 29.3%로 주요 언론사 조사에서는 처음으로 20%대로 떨어졌다. 이는 보수층에서도 이탈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상징적 신호로, 스가 총리로서는 대립 현안에서 한국에 양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 외교가에선 지배적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방일 무산 발표 뒤 추후 한ㆍ일 정상회담 추진 가능성을 묻자 “한ㆍ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 이번 정부 임기 말까지 계속 일본과 대화 노력을 해 나가고자 한다”며 “한ㆍ일 정상 간 만나게 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하지만 외교가에는 비관론이 많다. 도쿄 올림픽처럼 큰 경사를 계기로도 정상이 상호 방문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단독 방한이나 방일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정상회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국이 의제 등 조건을 두고 사사건건 맞붙으며 상호 신뢰는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 소식통은 “국내적으로도 몰려 있는 스가 총리가 일본 내에서 ‘반일’로 인식되는 문 대통령을 향해 적극적 손길을 뻗기는 어렵다. 결국 문 대통령의 임기 내에서는 큰 문제가 없도록 관리만 하고, 차기 정부와 관계 개선을 도모해보자는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스가 총리는 청와대 발표 뒤 일본 총리관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한(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해 우리나라(일본)의 일관된 입장을 토대로 한국 측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밝히면서도 ‘일관된 입장’을 언급, 한국이 먼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기존의 방침이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