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1주기 추모 행사에서 백 장군의 장녀 백남희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다부동은 6·25전쟁 당시 백 장군이 사단장으로 이끌던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파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게 한 곳이다.
행사가 열린 다부동전적기념관은 다부동 전투를 기리고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의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짐하기 위해 세워졌다. 백 장군은 국군 1사단장으로서 다부동 전투에 앞장섰다. 기습남침 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북한군은 다부동에서 막혔다.
백 장군의 1주기를 추모하는 자리에는 서욱 국방부 장관과 폴 러캐머라 신임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 김승겸 연합사 부사령관, 민홍철 국회 국방위원장, 이철우 경북도지사, 백선기 칠곡군수 등이 참석했다.
전직 한미연합사령관이었던 빈센트 브룩스(주한미군전우회장)와, 존 틸럴리, 토머스 슈워츠, 버웰 벨, 제임스 서먼, 월터 샤프, 커티스 스캐패로티 등이 추모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브룩스 전 사령관은 “다부동 전투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지휘관은 고 백선엽 대장님이셨다”며 “다부동에서 그의 용맹한 저항과 적과 기꺼이 맞서는 투지는 모든 미 8군 전원에게 결의를 불어넣었고 결국 이를 통해 전세를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백 장군이 사투를 벌인 다부동은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대구에서 20㎞ 떨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지역으로 유학산과 팔공산 사이의 큰 골짜기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김일성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4개 사단을 대구 축선에 집중, 국군 1사단을 공격했다. 그 중심에 다부동이 있었다. 이곳이 뚫리면 북한군은 곧장 부산까지 밀고 들어갈 상황이었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1일∼9월 24일 사이 55일간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5690여 명이, 국군과 미군은 3500여 명이 전사했다. 부상자까지 더해 남북이 2만7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부동 전투에서의 승리는 전쟁의 기세를 돌려놨다. 낙동강 전선을 지킴으로써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주역이었던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3남매를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해 생계를 꾸렸다.
군인이 되고 싶었던 백 장군은 1941년 12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9기 군관 후보생으로 입교해 이듬해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자무쓰(佳木斯) 부대에서 신병훈련소 소대장으로 근무하다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배치돼 광복 이전까지 활동했다. 광복 후 백 장군은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보직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은 빠르게 남하해 불과 5주 만인 1950년 8월 1일 낙동강 유역까지 도달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마산~왜관~포항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방어하라라고 미8군에 명했다. ‘낙동강 방어선’이다.
1사단은 낙동강 전선 중 대구를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육군본부, 미8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1사단은 턱없이 부족한 병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미8군의 도움을 받아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곳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백 장군은 치열한 전투 선봉에 서서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라며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고 말했다고 한다.
6·25 전쟁에서의 혁혁한 전공에도 백 장군에게는 친일 논란이 항상 따라붙는다.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 탓이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 영토에서 무장 항일 투쟁을 벌이던 팔로군과 동북항일연군 등 공산당 계열 빨치산들을 토벌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부대다.
2005~2009년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백 장군의 간도특설대 활동 내역을 토대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이에 일부 친여(親與) 단체가 백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식 때 반대 집회를 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