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사리밭이 있다. 출입이 제한됐던 고사리밭이 이제 문을 열었다. 고사리 채취가 끝난 7월부터는 마음껏 고사리밭 사이를 걸을 수 있다. 남해바래길 4코스 고사리밭길의 선물 같은 풍경이다.
여기에 땀과 눈물로 빚은 절경이 있다. 대관령 배추밭도 아니고, 남도 차밭도 아니다. 고사리밭이다. 고사리 따위가 만들어낸 풍경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으면, 경남 남해로 내려오시라. 그리고 해안 언덕을 따라 한없이 이어진 고사리밭을 걸어보시라. 해종일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의 세상에서 우리네 아버지가 흘렸던 땀을 기억하시라. 막 채취를 끝낸 국내 최대 고사리밭의 비경을 공개한다.
바다로 가는 길 국내 최대 면적의 남해 고사리밭
전체 4.3㎢, 여의도 크기 맞먹어
길이 16㎞ 사잇길 7월 완전 개방
능선 너머 푸르른 바다와도 조화
남해바래길 완주자들. 6월 22일 남해바래길 완주 인증서 수여식이 열렸다.
다자우길(다시 걷자 우리 이 길)이 네 번째 걸은 길은 남해바래길이다. 경남 남해군이 2010년 조성한 트레일로, 남해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구불구불 길이 이어진다. 이름에서 ‘바래’는 남해 사투리다. 어머니가 갯가로 나가 파래·미역·조개 따위를 채취하는 일을 남해에서 ‘바래’라 했다. 남해바래길은 바다로 일 나가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길이다. 하여 남해바래길은 대부분 바다와 바투 붙어 있다.
남해바래길은 지난해 11월 기존 코스를 수정하고 연장해 ‘남해바래길 2.0’을 개통했다. 모두 19개 코스(본선 16개, 지선 3개)로, 전체 길이는 231㎞다. 가천다랭이마을, 금산 보리암, 미조항 등 남해의 이름난 관광지를 두루 거친다. 6월 말 현재 남해바래길 2.0 완주자는 115명이다. 개장한 지 8개월 만에 115명이 231㎞ 길을 다 걸었다는 뜻이다.
부산에서 해남까지 남해안을 잇는 남파랑길이 남해바래길과 여러 구간이 겹친다. 남파랑길 90개 코스 중에서 36∼46코스가 남해바래길과 같은 길이다. 남해 해안을 바깥에서 도는 바래길 11개 코스가 고스란히 남파랑길로 지정됐다.
고사리 세상 6월 말 고사리밭 풍경. 고사리 채취 막바지, 농부는 좀처럼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고사리밭길은 남해바래길 4코스의 다른 이름이다. 지난해 11월 남해바래길 2.0을 완성할 때 새로 조성했다. 전체 길이는 16㎞로, 크고 작은 산을 부지런히 넘어야 한다. 코스 안에 슈퍼나 식당도 없다. 산행 준비하듯이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고사리밭이 들어선 자리는 경남 남해의 창선도 오른쪽 해안 구릉 지대다. 남해 읍내보다 바다 건너 삼천포가 더 가까운 지역이다. 남해도에서 죽방렴으로 유명한 지족해협을 건너면 창선도의 행정구역 창선면이다. 창선면 고사리밭의 면적은 4.3㎢. 여의도 전체 면적이 4.5㎢이니, 여의도만 한 고사리밭인 셈이다. 고사리밭에 들면 실감할 수 있다. 산이고 언덕이고 죄 고사리밭이다. 고사리 세상이다.
고사리밭은 고사리산이기도 했다. 고사리밭길은 여러 개의 고사리산을 오르내리는 길이었다.
이른 아침 고사리밭. 푸른 고사리 사이로 비치는 붉은 흙과 능선 너머로 드러나는 파란 바다가 한껏 채도를 끌어 올린 채 반짝이고 있었다. 이 이국적인 풍경이라니. 스위스 알프스 초원이 떠올랐고, 이탈리아 토스카나 포도밭이 겹쳐졌다. 고사리 따위가 이런 기적 같은 장관을 빚어내다니.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만 봤다.
11분의 1의 농사 창선도 주민이 고사리 농사를 지은 건 30년 정도다. 태풍 피해를 본 감나무 농가가 대신 고사리를 키운 게 시작이었단다. 지금은 1100여 농가가 고사리를 키운다. 고사리밭은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됐었다. 고사리밭 전경이 여태 공개되지 않았던 이유다.
고사리밭은 고사리산이기도 했다. 고사리밭길은 여러 개의 고사리산을 오르내리는 길이었다.
지난해 남해군 관광문화재단이 고사리 농가를 찾아가 밭 사이 농로를 걸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조건이 따랐다. 고사리를 채취하는 3월부터 6월 사이에는 출입이 제한된다. 관광문화재단이 지정한 인솔자와 함께 소수 인원만 고사리밭에 들어갈 수 있다. 7월부터 제한이 풀렸다. 한 번 채취가 끝난 고사리가 벌써 무릎까지 올라왔다. 다음 달이면 허리까지 올라온단다.
창선농협 김상찬 상무에 따르면 창선면의 연 고사리 생산량은 150톤이다. 창선면이 전국 고사리 생산량의 약 30%를 담당한다. 이때 기준은 밭에서 꺾은 고사리가 아니다. 밥상에 오르는 마른 고사리가 기준이다. 생(生)고사리 11㎏을 꺾어야 건고사리 1㎏이 나온다. 흙에 기대 사는 일이 늘 이렇다. 인간이 빚은 풍경이 천혜의 자연보다 더 눈에 밟히는 까닭이다.
남해바래길 4코스 고사리밭길은 16㎞ 길이로, 남해군 관광문화재단은 6시간 정도 걸린다고 소개한다. 난이도가 별 5개 기준별 4개로 매우 높은 편이다. 남해바래길은 전용 앱이 있다. 앱을 작동하면, 코스 정보부터 안내 전화번호까지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위치 추적 기능이 있어 길 잃을 염려가 없다. 남해바래길 전 코스를 완주하면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동대만 간이역을 지나 고사리밭으로 들어가면 종점 적량마을까지 식당은커녕 가게도 없다. 물을 넉넉히 챙겨야 한다. 남해바래길 탐방안내센터 055-863-8778.
남해=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