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유력 후보가 수사 대상이 된 건 2007년 ‘BBK 사건’ 이후 14년 만이다. 2012년 대선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른바 ‘NLL 대화록’ 사건을 둘러싼 고소·고발로 수사가 이뤄졌으나, 후보가 직접 연루된 사건은 아니었다. 대선 후보를 겨냥한 수사는 때론 고발인의 의도와 다르게 해당 후보에 유리한 결과로 이어진 적도 적지 않다. 정치권이 윤 전 총장 사건의 향배에 주목하는 이유다.
1997년 : ‘DJ 비자금’ 사건…검찰총장 “수사 유보”
고소·고발 사건이 대선판을 본격적으로 흔든 첫 사건은 1997년 ‘김대중 비자금’ 의혹이다.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은 1997년 10월 7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평화민주당이라고 배서된 1억 원짜리 자기앞수표 사본을 제시하며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신한국당은 후속 폭로를 이어가다, 같은 달 16일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후보를 직접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의 ‘수사 유보’ 결정은 여권 분열로 이어졌다.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총재는 다음 날 “검찰이 3김 정치의 압력에 굴복했다”며 김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고, 청와대가 즉각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신한국당 내홍이 시작됐다. 이후 YS의 측근이자 ‘DJ 비자금’ 사건의 첫 폭로자였던 강 사무총장은 “이 총재의 지시로 폭로가 이뤄졌다”고 밝힌 뒤 한동안 칩거하기도 했다. 대선 결과는 김대중 40.27%, 이회창 38.75%, 이인제 19.21%였다.
2002년 : 무혐의였으나…昌 상처입힌 ‘병풍 수사’
이후 김 씨와 한나라당 간에 고소·고발이 빗발치자, 검찰은 이번엔 대규모 수사에 착수했다. 80여일간 고소·고발 당사자 20명과 참고인 144명이 소환됐다. 하지만 결론은 무혐의였다. 이 후보 아들의 병적기록표 위·변조 여부, 병역문제 은폐대책회의 여부, 금품 수수 의혹 등 모든 의혹이 ‘증거 없음’으로 결론 났다.
검찰의 무혐의 처분은 이 후보에게 유리할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이 후보는 병풍의 여파를 이기지 못했다. 2002년 12월 19일 대선 결과는 노무현 48.91%, 이회창 46.59%였다. 의혹을 제기했던 김대업 씨는 검찰 출석을 거부하다 대선이 끝난 뒤인 2003년 1월 검찰에 다시 출두했고, 법원은 명예훼손, 수사관 사칭, 무고 등 혐의를 인정해 김 씨에게 징역 1년 10개월을 선고했다.
2007년 : ‘무혐의’ BBK 수사…민주, 기록적 참패
2007년 대선을 흔든 이슈는 이명박 후보의 이른바 ‘BBK 의혹’이었다. 첫 의혹 제기는 당내 경쟁자였던 박근혜 후보 측에서 시작했다. 최경환 당시 박 후보 캠프 상황실장은 2007년 6월 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후보가 사실상 BBK 공동대표”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 후보 측은 박 후보 측을 검찰에 고소했고, 검찰은 고소 취하 이후에도 “국민이 궁금해하는 의혹을 풀어 줘야 한다”며 수사를 강행했다.
한나라당 경선 이후엔 대통합민주신당이 네거티브 공세를 이어갔다. ‘정권 심판론’이 거셌던 당시 대선에서 ‘BBK 의혹’은 이명박 대세론을 저지할 최후의 카드로 꼽혔기 때문이다. 여야는 BBK 사건 관련 국정감사 증인 채택 문제로 충돌했고, BBK 사건 핵심 인물인 김경준 씨가 대선 30일여 일을 앞두고 국내로 송환되면서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다.
당시 선거 결과를 두고 현재 여권에서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네거티브에 매몰돼 스스로 무너졌던, 실패한 선거 캠페인”(민주당 중진 의원)란 평가가 나온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