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중년의 아빠···스무살 아들은 그의 '아빠'가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06 08:00

수정 2021.06.0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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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 감독이 아버지와 함께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르며 담벼락을 만들고 있다 영화 '1포 1㎏ 100개의 생애' 캡처

“너무 질어요? 너무 질면 나중에 금 가죠?”

목장갑을 끼고 회색빛 벽돌을 든 아들이 겸연쩍은 듯 묻는다. 자신이 만든 시멘트 반죽을 아버지가 말없이 삽으로 뒤섞는 걸 본 뒤였다. 미장이였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의 솜씨는 서툴기만 하다. 잘해보려는 아들은 거듭 질문을 하지만, 아버지는“이 추운 날 이걸 왜 만드는 거냐”며 시큰둥하다. 그렇게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르길 4시간 남짓, 번듯한 담벼락이 완성됐다. 시멘트 1포와 모래 1㎏, 벽돌 100개로 쌓아 올린 작품이다. 그제야 아버지의 입가에도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조기현(29) 감독이 치매 환자인 아버지(59)와 함께 직접 출연한 영화 ‘1포 1㎏ 100개의 생애’의 한 장면이다.

 

스무살, 아빠의 ‘아빠’가 됐다

초로기 치매인 아버지를 위해 조기현 감독이 집에 적어 놓은 메모. 영화 '1포 1㎏ 100개의 생애' 캡처

영상 속에선 웃지만 조씨 부자의 실제 삶에선 웃음보단 울음이 많다. 초등학생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아들은 아버지와 월세방에서 단둘이 지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아들은 중학생 때부터 직접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던 그에게 2011년 뜻밖의 시련이 닥쳤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쓰러진 것이다. 중환자실로 실려 온 아버지의 손은 시멘트로 범벅이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증상이 당뇨 쇼크라고 했다.
 
갓 성인이 된 아들은 2인분의 삶을 책임져야 했다. 월세를 올리는 조건으로 보증금 일부를 받아 병원비에 보탰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병시중은 점점 길어졌다. 아버지가 초기 치매와 경도 인지장애를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으면서다. 동선이 집으로 제한되면서 늘어난 음주가 독이 됐다. 초로기(노년기 이전) 치매 환자인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리모컨 사용법부터 소지품 보관 장소까지 집안 곳곳에 쪽지를 붙였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의 ‘아버지(보호자)'가 됐다.
 
꿈만 좇기에도 버거운 나이지만 ‘아버지’가 된 아들은 책임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영화 ‘파이 이야기’ 속 주인공 같다고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을 위협하지만, 돌봐야 하는 호랑이가 있어 끝까지 바다 위에서 버틸 수 있었다. 조씨는 아버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자신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가 평생 해온 건축 일을 함께하는 모습을 영화로 찍은 것도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위로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다. 아버지와 자신을, 자신이 항상 선망하는 영상이라는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는 게 그의 뜻이다. 부자의 기록은 정식으로 개봉하진 않았지만 지난해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인천 미림극장에서는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를 연출한 조기현 감독과 치매환자 및 가족과의 대화가 열렸다. 사진 인천시

 

“초로기 치매 환자 권리도 보장해야”

지난달 26일 인천 미림극장에서는 영화 '1포 10kg 100개의 생애'를 연출한 조기현 감독(오른쪽)과 치매환자 및 가족과의 대화가 열렸다. 사진 인천시

지난달 26일 조씨는 오랜만에 관객 앞에 섰다. 인천시 동구 미림극장에서 ‘1포 1㎏ 100개의 생애’를 상영하면서다. 인천의 유일한 ‘실버’극장인 미림극장은 지난 3월부터 매월 마지막 주 치매 환자와 그 가족을 위해 ‘가치 시네마’를 열고 있다. 치매 환자를 위한 환경에서 고전 영화와 치매 관련 영화를 상영하는 프로젝트다. 이날 영화를 관람한 이모씨는 “치매 환자들도 각자 잘하는 일이 있는데 사회가 알아주지 않는다”며 “조 감독의 영화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가 해왔고, 잘할 수 있는 일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조씨는 사람들이 자신을 효자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자신의 활동을 효행이 아닌 약자인 동료를 돕는 시민의식으로 바라봐줬으면 하는 게 그의 뜻이다. “어쩌면 치매 환자들이 하는 일은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생산성이라는 관점을 조금만 걷어보면 그들에게도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게 보일 거예요. 사회가 여기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10년째 아버지의 ‘아버지’로 살아온 아들의 간곡한 바람이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