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의 상징물과도 다름없던 구령대가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됐다. 구시대의 틀을 깬 파격적인 공간 변화이지만 놀이터의 위치만으로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통상적으로 학교 놀이터의 위치는 교실에서 가장 먼 곳, 운동장 건너편이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멀찍이 떨어뜨려 놨다.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남다른 놀이터의 이유
아이들을 놀이터에 가뒀다고?
도시 전체가 놀이터가 된다면
구령대 위에 다락방 같은 트리 하우스를 하나 더 올리고 진입 동선을 층층이 다양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은 옛 구령대를 넘나들며 트리 하우스를 향해 계단과 경사로를 자유롭게 오른다. 미끄럼틀도 없는 놀이터지만, 아이들은 곧장 새로운 놀이방법을 만들었다.
맞춤 제작한, 더군다나 건축가가 짓는 놀이터라니 생소하다. 지금까지 놀이터는 대량 생산된 놀이기구 위주로 공급됐던 터다. 놀이터의 역사가 짧기도 하다. 1ㆍ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서구의 도시에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됐다. 도시가 복구되고 대량으로 주택이 공급되면서 놀이터 역시 규격화되기 시작했다. 놀이터 하면 떠오르는 세트가 이때 굳혀졌다. 흔히 ‘3S’라고 불리는데 미끄럼틀(Slide), 그네(Swing), 시소(Seesaw)를 뜻한다. 이게 일본을 거쳐 1970년대 한국에 정착했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는 ‘휴식하는 공간’
동답초의 구령대 놀이터도 이 캠페인으로 지어졌다. 이를 디자인한 지정우ㆍ서민우 건축가는 놀이터라는 말보다 어우러져 놀 수 있는 놀이풍경을 짓는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었더니 ‘신나게 뛰는 곳’이라고 답하는 아이가 드물었다. 휴식, 마음의 쉼터, 인생, 위로, 재미, 자유, 조금 위험한 곳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두 건축가는 건물을 짓듯 놀이터를 짓는다. 주변 환경을 분석하고, 건축주나 다름없는 아이들에게 어떤 놀이터가 필요한지 묻는다. 서울시 교육청의 꿈을 담은 놀이터 프로젝트로 지어진 동대문구 배봉초의 등굣길 놀이터도 그렇게 탄생했다. 배봉산 기슭에 있는 학교는 정문부터 학교 교실까지 온통 경사지였다. 아이들은 이구동성 말했다. “학교 오는 게 힘들어요.”
지정우 소장은 “교실에서 운동장까지도 멀어서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놀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 학교 교실과 가깝게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배봉초의 새 놀이터는 학교의 지형을 고려한 맞춤형 놀이 처방전이자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놀이 공간인 셈이다.
놀이터는 왜 노원ㆍ강남구에 많을까
결국 기존에 제품 인증을 받은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만든 놀이기구를 갖다 설치하게 된다. 벽돌이나 콘크리트로 놀이 공간을 만들 수 없다. 무엇보다 완공 후 검사해 합격ㆍ불합격 판정을 하니 시공사도 새로운 시도를 하길 꺼린다. 지정우 소장은 “새로운 놀이 집을 만드는데 싱크대 수도꼭지 기준으로 그 집을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놀이터는 도시와 닮았다. 도시의 밀도가 높으면 놀이터의 밀도도 높다. 아이들에게 놀 땅을 내줄 여유가 없으니 그렇다. 한국에서 공간을 만들어 주기보다 놀이기구 중심으로 놀이터가 발전한 또 다른 이유다. 놀이터 전문가인 김연금 조경가(조경작업소 울 소장)는 “조그만 놀이터에 모든 연령층이 놀 수 있게 만들어야 하니 어떤 연령대도 행복하지 않은 놀이터가 만들어지곤 한다”고 설명했다.
도시 전체가 놀이터가 된다면
이미 해외 여러 도시에서는 놀이터의 개념을 도시 전체로 확장하고 있다. 198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아동 친화 도시의 기초가 됐다. 국내에서도 이런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활동을 독려하기보다 보호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2019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3기 신도시를 아동 친화적인 도시를 만들겠다며 연구용역을 냈다. 이를 맡은 김 소장은 ‘아동 놀이 행태를 고려한 도시 공간 조성방안 연구’를 진행했다. 아이들이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어디서나 놀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이를 위해 해외 도시를 둘러본 김 소장은 “네덜란드 로테르담, 암스테르담의 경우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놀이터가 튀어나온다”고 전했다.
난데없이 나오는 놀이터는 이 놀이보도다. 도로 한 쪽에 최소 3~5m가량 폭을 확보해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혼자 다닐 수 있게 안전한 가로환경을 만들면서 놀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김 소장은 “도시가 아이들에게 ‘너희의 도시다’, ‘너희가 놀아도 되는 도시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광장 곳곳에 비슷비슷한 하얀색 계단식 원추형 공간이 있는데 각각의 쓰임새가 다르다. 테이블이 되기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트램펄린이 되기도 한다. 지정우 소장은 “논다는 행위가 꼭 무언가를 타거나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터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걸터앉아 쉴 수 있고 간식도 먹을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한 장소, 우리의 놀이 공간도 적극적인 시민 공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강조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