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삼성전자를 보자. 지난해 8월 가동에 들어간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장이라는 삼성 평택2 라인. 축구장 16개만 한 이 공장은 직접 고용만 4000명에 협력사 인력을 포함, 3만명이 넘는 고용을 창출한다. 평택2 라인 건설비는 30조원. 투자 대비 고용 효과가 같다는 가정 아래 이 땅에 19조원 짜리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 직원 2500여명에 1만9000개의 관련 일자리가 생긴다. 함께 투자할 현대차·SK하이닉스· LG에너지솔루션까지 합치면 미국으로 넘어갈 대기업 일자리는 너끈히 5000개가 될 수 있다. 삼성·현대차·SK·LG 등 4대기업의 예년 신입사원은 각사당 한해 1만명 안팎이었다. 이번에 날아간 일자리가 얼마나 큰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이래 실업 문제를 풀기 위해 나갔던 자국 기업을 국내로 불러들이는 동시에 외국기업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공격적으로 펴왔다. 성과도 눈부셔 2010년 이래 올 초까지 미 산업 분야의 신규 일자리 140만개 중 절반인 70만개가 리쇼어링에서 나왔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임기 중 500만개의 일자리를 리쇼어링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그러니 한국 대기업이 얼마나 고마웠겠나. 그가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한국 대기업들에 "생큐"를 연발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은 코로나가 퍼지기 전 미국의 실업률이 우리보다 낮다는 사실이다. 2019년 한해 한국의 실업률은 3.8%, 미국은 3.7%로 0.1p% 낮았다.
해외 직접투자는 현지 생산이 훨씬 유리할 때 하는 게 원칙이다. 자동차, 대형 가전제품 등 물류비용이 많거나 관세가 높을 때 쓰인다. 그러나 반도체는 무관세 품목인 데다 물류비용이 거의 안 든다. 반도체 공장이라면 굳이 외국에 갈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물론 너무도 절실하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몫이어야 할 꿈의 직장도 내줄 수 있다. 1960년대 베트남전 때는 젊은 장병의 목숨, 그리고 간호사·광부들을 독일에 파견할 때는 처절한 삶의 대가로 투자를 위한 외화를 벌어왔다. 그렇다면 이번엔 무엇을 얻었나.
한국군 55만명분 백신을 챙겼다지만 미국이 풀겠다는 건 8000만회 분이다. 두 번씩 맞는다 해도 전체의 1.4%로 생색내기에도 부족한 양이다. 한국이 미국의 첫 백신 파트너가 돼 모더나 백신을 국내 생산하게 됐다는 것 역시 크게 흥분할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생산하기로 한 것이지 국내 공급을 위해선 별도 계약이 필요하다. 백신 파트너십은 한국만 맺은 것도 아니다. 지난 3월 쿼드 정상회담 때 미국은 일본·호주·인도와 백신 파트너십을 맺었으며 지난달 미·일 정상회담 때도 양측은 이를 재확인했다.
또 모더나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등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도 백신을 생산할 계획이라고 한다. 모더나 사장은 지난 21일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을 포함, 아시아 몇몇 나라와 현지 생산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호주에서 생산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란 보도도 있다.
어쨌거나 4대 기업이 대미 투자 계획을 밝힌 이상 무르기는 어렵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투자 외교'가 헛되지 않게 모더나 백신이라도 확실히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 대통령은 소중한 청년 일자리를 헛되게 날렸다는 원망을 피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