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화근 된 명나라 무장
한밤중에 조선 군신들이 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긴급했던 사건의 전말은 무엇인가. 당시 진강은 후금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7월 20일, 진강성에 있던 한인 진양책(陳良策)이 모문룡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켜 성주 동양원(佟養員)이란 자를 사로잡고 한인 60여 명을 살해한다. 모문룡 휘하의 명군이 진강을 기습 점령하고 한인 반역자들을 처단한 사건이었다. 광해군은 의주 지척에 있는 진강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조선에 미칠 여파를 걱정했다.
후금에 쫓겨 평안도에 온 불청객
“요동 정벌” 빌미 막대한 부귀 챙겨
광해군 때 외교정책 골칫덩이로
인조는 명 책봉 의식해 극진 대우
국가경비 중 3분의 1이나 지원도
민생 무너지며 반중 감정 싹터
어쨌든 잠시나마 진강을 휘저어 놓았던 모문룡이 입국하면서 조선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후금이 모문룡을 응징하기 위해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바짝 긴장했다. 그렇다고 명나라 장수인 모문룡을 홀대할 수도 없는 것이 조선의 처지였다. 그런데 모문룡은 조선에서도 문제를 계속 일으켰다. 병력을 이끌고 용천·철산·의주 등지와 압록강 연안을 들락거리면서 “잃어버린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떠벌렸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풍에 불과했지만 후금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구타하고 관아까지 습격해
모문룡이 조선에 머문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후금 치하에 있던 요동의 한인들이 동요했다. 요민(遼民)이라 불리던 그들이 대거 조선으로 몰려왔다. 요민들은 거칠고 난폭했다. 무리를 지어 청천강 이북 지역을 몰려다니며 식량을 내놓으라고 떼를 썼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주민들을 구타하거나 약탈하고 관아까지 습격했다.
자신들의 백성이자 노동력인 요민들이 자꾸 이탈하자 후금은 격앙됐다. 조선에 국서를 보내 요민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1621년 12월 15일, 후금군은 실력 행사에 나선다. 압록강을 몰래 건너 가산(嘉山)의 임반(林畔)까지 침입하여 모문룡 부대를 급습했다. 모문룡은 변복하고 달아나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진양책을 비롯한 한인 1500여 명이 피살됐다.
기습 작전 이후 누르하치는 모문룡을 잡아 보내라고 협박했다. 광해군은 사람을 보내 모문룡에게 섬으로 들어가라고 종용했다. 후금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고 수군이 시원찮은 상황에서 섬으로 피신하면 모문룡과 조선 모두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계책이었다. 명과 후금 모두를 의식해야 했던 처지에서 생각해낸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모문룡은 반색했다. 자신을 ‘화근’으로 취급했던 광해군이 폐위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한 인조는 모문룡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명 조정으로부터 책봉(冊封·왕으로 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그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모문룡에게 군량을 공급하고, 요민들이 평안도 일대에서 횡행하는 것을 방관했다. “모문룡과 힘을 합쳐 후금 오랑캐를 토벌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 정권은 필사적으로 모문룡에게 매달린다. 자칫 반란군에게 정권을 넘겨줄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모문룡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쑥대밭으로 황폐화한 청천강 북쪽
모문룡과 요민들 때문에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하는 것은 물론 조선의 경제적 부담도 격증했다. 해마다 막대한 양의 군량을 가도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1623년에 6만석, 1626년에 15만석이 되었고, 1627년엔 군량 조달 비용이 국가 경비의 3분의 1에 이르렀다. 급기야 군량 조달을 위해 경기도·강원도·삼남에서 모량(毛粮)이라 불리는 특별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밀수 왕초이자 해외천자처럼 군림
명 조정으로부터 감시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데다 인조 정권의 저자세가 맞물리면서 모문룡은 가도에서 ‘밀수 왕초’이자 ‘해외천자(海外天子)’로 군림했다. 매번 식사 때마다 오륙십 가지의 성찬이 식탁에 오르고 미녀 아홉 명이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1627년 1월, 후금은 ‘모문룡을 제거하고 그를 비호하는 조선을 응징한다’며 정묘호란을 일으킨다. 후금군의 침략으로 수많은 평안도 주민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주목되는 것은 당시 평안도 백성 중에 모병들을 공격하여 살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병과 요민들이 자행했던 극심한 횡포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인조 정권이 모병과 요민들의 작폐에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계기로 반한(反漢) 감정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이 후금과 화약(和約)을 맺고 후금군이 철수하자, 잠시 숨죽이고 있던 모병들은 조선 백성들에게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모문룡이 “오랑캐와 화친하여 명을 배신했다”고 비난을 퍼붓자 인조 정권은 이렇다 할 대책이 없었다. 그 와중에 평안도 백성들은 또다시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1621년 불쑥 나타났던 불청객 모문룡과 그가 불러들인 요민들의 작폐와 횡포 때문에 조선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그 같은 배경에서 일각에서는 ‘반한 감정’이 표출됐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