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태윤의 이코노믹스

[성태윤의 이코노믹스] 나랏돈 많이 풀수록 빚 많은 기업·가계 더 힘들어져

중앙일보

입력 2021.05.0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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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재정 지출의 어두운 그림자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경제가 국가 부도에 직면한 1997년,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11월을 불과 수개월 앞둔 그해 4월 금융계는 감독기구 개편 문제로 시끄러웠다. 개편 작업의 방향은 통합 금융감독기구 설립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서 은행감독 기능을 분리하는 문제였다. 한국은행의 감독권 분리에 대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산하 행정기관인 금융감독위원회와 무자본 특수법인 금융감독원을 설치해 은행·증권·보험 등에 대한 금융감독 업무를 담당하도록 만드는 관련 법안이 외환위기 와중에 통과됐다.
 
그 무렵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에서도 금융감독 기능이 분리됐다. 다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영란은행의 금융감독 기능이 다시 회복된다. 금융감독을 누가 수행해야 하는지 업무영역에 따라 논쟁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치적인 중립성과 금융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한 기관이 책임져야 한다는 데에 큰 이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융시장 및 거시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감독업무는 정치적 중립성이 강조되는 기관으로 통화정책을 통해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수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은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에서 은행과 관련된 금융감독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선심성 재정 지출로 나랏빚 많아져
세금 인상 어려워 국채로 재원 조달
국채 많이 발행하면 금리 상승 자극
결국 취약 계층은 이자 부담 늘어나

공공지출 늘어날수록 구축효과 커져
 

성태윤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은 동남아시아에 위기가 번지고 국내 주요 기업들이 무너지는 가운데 금융시장 불안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의 계절이었기에 경제위기에 대한 경고와 경제 논리는 무시되고 있었다. 중앙은행이 조직개편 문제와 정치적 압력으로 흔들렸으니 경제논리를 지키면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는 어려웠을 수밖에 없다.
 
지금 2021년의 상황도 1997년의 데자뷔를 떠올리게 한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한국은행은 그때와 유사한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에 따른 국가부채 급증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환경은 중앙은행에 도전의 시기로 볼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이미 경제가 나빠졌고 여기에 코로나19 충격이 겹치면서 재정지출 수요가 커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재정지출의 증가속도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게 빠른 데다가 특히 선거를 앞두고 경제적인 타당성과 효과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대규모 사업까지 증가하고 있다. 더구나 사실상 증세가 이미 진행된 상황이기 때문에 국민의 실질적인 세금 부담도 높아져 있어서 세금을 통한 재원 마련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정부로서 현 상황의 돌파구는 대규모 국채발행이 될 가능성이 크다.


회사채 신용평가 현황

하지만 국채가 금융시장에 쏟아지게 되는 경우,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더라도 채권 중심으로 시장금리가 높아지면서 정부 이외의 다른 민간 경제주체의 자금조달을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국채는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되기에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떨어지는 민간 경제주체가 자금을 조달할 때 사용하는 금리는 더욱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공공 재정지출 확대가 이자율을 상승시킨 결과 민간의 투자 및 자금조달을 위축시키는 일종의 ‘구축 효과’가 발생한다. 더구나 경기 부진으로 기업과 가계의 체력은 약화한 상태이기에, 원리금 상환 부담이 증가한다면 이들 입장에서 금리상승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가산 금리를 적용받고 있는 신용이 낮은 기업과 가계를 중심으로 타격이 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정부가 발행한 국고채를 한국은행이 직접 매입하는 방안까지 등장했다. 예를 들면, 코로나19 피해에 대한 손실액을 최대 70% 범위에서 보상하고, 재원 마련을 위해 국채를 한국은행이 매입하게 하는 제안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익 공유제, 보편적 재난지원금, 기본소득 재원 등 각종 용도로 한국은행이 국고채를 직접 인수하게 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직접 중앙은행이 인수하게 하고 그 대신 화폐를 발행해 그렇게 조달된 재원을 정부가 사용하겠다는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 of debt)’ 주장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정부가 직접 윤전기를 돌려 돈을 마음대로 찍어 쓰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랏빚 늘어나면 결국 세금 거두는 효과
 
‘부채의 화폐화’로 찍어내는 돈이 증가하면 통화 공급 증가에 따라 인플레이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잘 알려진 문제다. 흔히 ‘인플레이션 세금’으로 지칭되는데, 화폐 발행을 통해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상승하면 사실상 그만큼 국민의 소득과 재산의 실질가치를 정부로 이동시키는 효과가 발생해서 실질적으로는 조세징수와 같은 효과다. 즉 ‘부채의 화폐화’는 중앙은행이 조세 당국으로 강제 전환돼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회사채 신용 스프레드

또한 국가의 경제와 화폐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무너뜨리게 된다. 부채의 화폐화는 화폐로 표시된 자산의 가치가 언제든지 정부나 권력에 의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천명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화폐의 대외 가치를 의미하는 환율의 불안정성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해당 통화로 표시된 대부분 자산의 가치가 하락할 수 있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해당 국가의 대외신용도에 부정적인 영향이 발생하는 것도 피하기 어렵다. 즉, 부채의 화폐화 천명은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과 경제주체의 신용 평가 등급을 하락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정부와 권력이 사용한 비용의 대가를 국내자산의 가치 폭락 또는 외환위기 형태로 국민이 부담하며 소득과 재산이 감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의 존재 가치에 대해 본질적인 도전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렇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재정의 방만한 운영은 가속화된다.
 
선거는 반복되고 정권은 유한하지만 건전한 재정과 경제의 운영 그리고 국민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부채의 화폐화는 근본적으로 재정과 국민경제, 재산권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켜 경제의 지속가능성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외환위기 때 그랬듯이 중앙은행이 흔들리면 경제가 무너질 수 있다. 중앙은행의 시작과 발전 자체가 권력에 의한 재산권 훼손을 막고 정치적인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부채의 화폐화를 저지하는 과정과 함께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제군주 시절에는 정부가 함부로 돈 찍어 국민에 부담시켜
‘국채의 화폐화’가 지닌 위험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중앙은행의 국채 직매입을 명시적인 법률로 규제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법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국채 또는 원리금을 전액 보증한 중·장기채권은 오직 공개시장에서만 매매할 수 있다. 유럽에서도 유럽연합조약을 통해 유럽중앙은행과 유럽연합 회원국의 중앙은행 국채 인수 및 대정부 대출을 금지하고 있다.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확장적인 통화정책을 위해 양적 완화와 같은 대규모 국채 매입을 할 때가 있었다. 그 경우는 부채의 화폐화 우려가 큰 국채의 직접 인수가 아니라 채권시장에서 이를 공개 매입하는 방식이다. 즉, 정부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사실상 강제로 중앙은행에 채권을 인수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통화정책 과정에서 중앙은행 판단으로 금융시장의 채권 수요와 공급에 따라 국채를 매입한다.
 
과거 전제군주 시절에는 재정 당국과 중앙은행이 분리되지 않았거나 독립적인 화폐 발권 기관으로서의 중앙은행이 존재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기에, 이런 경우에는 사실상 ‘국채의 화폐화’를 통해 돈을 찍어냄으로써 국민의 재산을 정부가 함부로 사용한 경우를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경제체제에서는 정부라도 법률상의 조세로 규정되지 않는 임의의 방법으로 국민의 재산권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의 책임과 역할이 강조하며 재정조달 수단으로의 발권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정부의 재정조달 수단으로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고 있다고 평가되는 순간 해당 국가의 화폐와 경제는 신뢰를 받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정부 채권을 직접 인수하거나 정부재정에 대출하는 것은 금지한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국가부채의 직접인수가 법률상의 명시적인 금지 사항이 아니고, 한국은행법 제75조에 따르면 정부로부터 국채를 인수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외환위기가 발생하던 해 1997년을 마지막으로 한국은행의 국채 직매입은 사실상 중지됐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