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피해자보호명령에 “그냥 종이일 뿐”
남편을 피해 집을 떠나있던 B씨는 지난달 5일 법원으로부터 남편에게 임시보호조치명령서가 송달됐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 날 집을 찾았다. 그러나 남편이 여전히 집에 거주하고 있자 B씨는 112에 신고했고, 서울 강서경찰서 관할 지구대의 A경위 등이 출동했다. 집 밖에서 경찰을 기다리던 B씨는 경찰이 도착하자 함께 집으로 향했다.
“경찰은 못 도와준다”, 판사에게 전화하라 요구
B씨가 임시보호조치명령서를 보여주자 A경위는 “이건 그냥 종이일 뿐이다”고 일축했다. A경위는 B씨에게 해당 명령서를 발부한 판사에게 전화를 해보라면서 “법원이 이렇게 종이 딱지만 보내놓은 건 무책임한 것”이라며 “우리는 법원하고 다르다. 우리한테 강제력을 요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후배 경찰이 도와주려 하자 “너는 나가 있어”
피해자 B씨가 집 안에서 가해자인 남편과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편을 두둔하는 듯한 A경위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A경위는 “남편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B씨에게 “떼쓰지 말고 서로 한 발씩 양보하라”고 말했다. 이에 B씨가 “오늘 또 밖에 나가 있어야 하냐”고 묻자 A경위는 “그렇다, 남편 얘기도 일리가 있지 않으냐”고 했다. 결국 B씨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와야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B씨는 “A경위는 거실에서 가해자인 남편에게 자신의 명함을 줄 정도로 친절하게 대했다”며 “가정폭력 등 여러 사건에서 피해자 보호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되고 있지만,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B씨는 “‘떼쓰지 말라’는 경찰 말을 듣고 다시 남편을 피해 집을 나오면서 엄청난 실망감과 절망감을 느꼈다”라고도 했다.
현행범 체포해야 하는데…경찰 “업무 미숙했다”
김경수 변호사(법률사무소 빛)는 “가정폭력행위자가 법원의 임시보호명령을 어기고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면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즉시 퇴거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이를 거부하는 경우 현행범으로 체포했어야 한다”며 “이러한 경찰의 행동은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매우 부적절한 대응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경찰의 대응에 대해 강서서 관계자는 “경찰이 강제력을 행사해 남편을 퇴거시키는 게 맞았다”며 “출동한 경찰이 이런 상황을 자주 처리하지 않다 보니 업무에 미숙했던 부분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덧붙였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