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춘향이가 한문을 쓴 까닭은?

중앙일보

입력 2021.04.29 00:41

수정 2021.04.29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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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자본과 정치 

illustration of man sailing on a book [Shutterstock]

바이러스 유행만 아니었다면, 봄 축제가 열렸을 것이다. 봄 축제에는 춘정(春情)이 넘치기 마련이다. 춘정이라는 말에는 봄의 정취라는 뜻 이외에도 성애(性愛)의 뜻이 담겨있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봄을 맞아 클럽에 춤추러 가듯이, ‘춘향전’에서 춘향이는 단오를 맞아 춘정을 발산하기 위해 그네 타러 간다. 야한 복장을 입고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에 올라 화려한 춤솜씨를 발휘하듯이, 춘향은 스테이지에 올라(“버드나무 백척 높은 곳에 높이 매고 그네를 뛰려 할 제”) 야한 복장을 입고(“홑단 초매 훨훨 벗어 덜어두고…백방사 진솔 속곳 턱밑에 훨씬 치켜 올리고”) 그네를 타며 육체적 매력을 전시한다.
 
이것은 노골적인 유혹행위다. 아니나 다를까, 이몽룡이 춘향이의 매력에 반해서 탄식하듯 말한다. “훌륭하다!” 춘향전의 배경인 조선 사회는 신분사회다. 지체 높으신 도련님은 직접 상대를 꼬시는 것 같은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 대신 하인을 보낸다. 하인 방자는 춘향이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 “백방사(白紡絲) 속곳 가래가 동남풍에 펄렁펄렁 박속같은 네 살결이 백운 간에 희뜩희뜩, 도련님이 보시고 너를 부르셨지.”

문화는 신분의 상징이 되기도
차별과 배제의 도구가 되기도 해
문화적 배제가 심화되지 않게
문화의 정치학을 숙고할 때

그런데 춘향이는 느닷없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쏟아낸다.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雁隨海, 蝶隨花, 蟹隨穴. 기러기는 바다를 따르고, 나비는 꽃을 따르고, 게는 구멍을 따른다는 뜻)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방자는 춘향이 자기한테 욕을 퍼붓는 줄만 안다. 한문을 할 줄 아는 이몽룡은 이 말이 자기를 오라 가라 부르지 말고, 당신이 직접 자기를 찾아오라는 뜻임을 바로 이해한다.
 
춘향이는 왜 갑자기 한문 문장을 구사했을까? 이 상황을 현대의 클럽에서의 상황에 비견해보면 다음과 같다. 클럽 스테이지에서 누군가 야한 옷을 입고 현란하게 춤을 추며 자신의 육체적 매력을 발산하자, 그 사람을 꼬시기 위해서 부유층 도련님이 자기 똘마니를 보낸다. 똘마니는 스테이지에 다가가서 말한다. “하얀 네 속치마가 에어컨 바람에 펄렁펄렁 박속같은 네 살결이 조명 아래 희뜩희뜩, 도련님이 보시고 너를 부르셨지.”
 
그러자 스테이지의 춤꾼은 느닷없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쏟아낸다. “아우덴테스 포르투나 이우바트”(Audentes fortuna iuvat. 행운은 대담한 자들의 편이라는 뜻) 똘마니는 영문을 몰라서 외국어로 욕하는 줄만 알았는데, 라틴어를 할 줄 아는 도련님은 이 말이 결국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취지이며, 다시 말해서 남을 시켜 자기를 오라 가라 부르지 말고, 당신이 직접 오라는 뜻임을 바로 이해한다.


왜 갑자기 라틴어나 한문을 구사했을까? 자신은 한문이나 라틴어같은 고전어를 구사할 정도의 지식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그에 맞추어 관계를 맺어달라는 요구다. 즉 자신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므로 구애하는 당신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라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사랑스럽지 못해서 완곡하게 거절하고 싶었다면,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우트 아메리스 아마빌리스 에스토.”(Ut ameris, amabilis esto. 사랑스러워져라, 그러면 사랑받을 것이라는 뜻)
 
이렇게 특정 계층 사람만 알아들을 것 같은 언어를 사용해서 상대의 ‘급수’를 측정하는 장면은 ‘춘향전’에 또 나온다. 변사또가 남원의 양반들과 함께 광한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거지꼴을 한 이몽룡이 나타난다. 누군지 의아해하던 양반들은 이몽룡에게 시를 한 수 지어보라고 한다. 그러자 이몽룡은 바로 응답한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性膏), 촉루락시민누락(燭淚落時民淚落),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금동이의 맛있는 술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요, 옥소반의 맛있는 안주는 수많은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드높은 곳에 원망 소리 드높다.
 
왜 느닷없이 시를 지어보라고 한 걸까? 거지꼴을 한 저 양반이 과연 자기들과 교유할만한 상대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한시는 당시 귀족이나 받을 수 있는 고급 교육의 산물이다. 한시를 제대로 짓는다는 것은 자신이 귀족(양반)에 속하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한시를 교환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같은 계층에 속해있음을, 따라서 함께 놀 만한 상대임을 확인하는 행위다. 여기에 이른바 소셜믹스(social mix)에 대한 고민은 없다. 오히려 자기 계층을 하위 계층으로부터 구별시키고자 하는 집요한 의지가 있다.
 
이런 사례는 조선 시대와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두루 찾을 수 있다. 홍대용이 중국에 다녀온 체험을 적은 기행문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에는, 홍대용이 중국 장사꾼의 수준을 측정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첨수참에 이르러 한 장사치를 만나니, 성은 백이요 산서 사람이다. 약간 글을 읽어 인물이 적이 조촐하여 그 푸자에 이르러 여러 말 주고받으니, 팔 것을 가지고 이곳에 이른 것이다. 초 6일 식후에 숙소로 찾아왔거늘 캉 위에 앉히고 지은 굴을 이르라 하니 두어 시를 써 뵈었는데 비록 귀법이 용졸하나 장사치 중에 눙히 시를 일삼으니 또한 귀한 일이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주인공 창대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자신보고 경서(經書)나 약간 익혔을 뿐 한시를 짓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상처받는다. 시를 짓지 못한다는 말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천한 놈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절치부심한 창대는 그 이후 배움에 매진하여, 급기야는 한시 대결을 통해서 자신을 한때 비웃었던 정약용의 제자에게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한다.
 
수년 전쯤, 강남 어딘가에 영어로만 주문할 수 있는 레스토랑 혹은 카페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영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상당한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자기 돈 내고 밥 먹으며 소외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그곳에 발길을 멀리하게 되고, 그곳에는 영어로 능숙하게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이 모이게 될 공산이 크다. 그 과정에서 영어를 배울만한 형편이 되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레 배제될 것이다. 영어로 주문하는 것 정도야 많은 사람이 할 수 있지 않냐고? 만약 발음이 이른바 ‘본토 발음’이 아니어서, 주문과정이 원활하지 않으면 그 역시 사람을 배제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영어가 불편한 사람은 음식에 불만이 있어도, 불만을 제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부모 덕택에 조기 영어 유학을 하거나 조기 외국어 교육을 받은 이들이 그곳에 모이고,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의 한시나 현대 한국의 영어나, 가족이나 교육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윤 확보 메커니즘이라는 점에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의 일종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특정 계층 혹은 신분의 사람들만 구사하기 십상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신분 상징(status symbol)의 측면도 있다.
 
많은 것들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시대의 환경과 가치가 달라짐에 따라 자연히 문화 자본의 내용이나 구체적인 신분 상징도 변한다. 20세기만 해도 영어는 부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예컨대 미 군정(軍政) 시기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열렸던 기회의 폭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 하나로 요직에 진출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늘어났다. 영어가 계층 상승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들이 자식들의 영어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로 인한 구별이 희미해지면, 자신의 계층을 다른 계층과 더 분명히 구별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좀 더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자신을 상대와 차별하려 들 수도 있고, 아예 다른 외국어 습득으로 눈을 돌릴지도 모른다. 이 차별과 배제의 동학이 미쳐 날뛰지 않도록 하는 것도 현대 정치의 중요한 과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의 흐름과 더불어 문화도 변한다. 이제 한시의 위세는 그 전과 같지 않으며, 시 자체가 더 이상 신분의 상징이라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시집 『이 시대의 사랑』 표지에다 시인 최승자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시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