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분수대] 원더풀

중앙일보

입력 2021.04.27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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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

10년도 더 된 일이다. LA 코리아타운 거리를 홀로 걷고 있던 내게 한 한국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아무리 코리아타운이지만 LA 한복판에서 할아버지는 너무도 스스럼없이 한국말로 길가는 청년을 대뜸 불러 세운 것이다. 그러더니 곧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국에 있다가 최근에 딸이 불러서 미국으로 왔다. 우리 딸은 미국에서 아주 잘 사는데, 내가 한국에 혼자 있는 게 걱정이 됐다더라. 그런데 여기는 너무 재미가 없다. 노인들이 할 일이 영 없다.”
 
타국에 와서 얼마나 적적했으면 길 가던 한국인을 붙잡았을까. 성의껏 맞장구를 쳐 드렸다. 마치 일방통행 같던 대화가,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잘 나갔는지에 대한 끝없는 자랑으로 치달을 즈음 약속 시각이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할아버지는 다시 코리아타운 한복판을 향해 걸어갔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 순자(윤여정 역)가 처음 등장할 때 문득 과거에 마주쳤던 그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딸의 초청으로 이역만리 미국 땅을 밟은 한국 노인의 모습이라는 공통점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영화의 줄거리가 흘러갈수록 순자가 주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외로워 보였던, 한편으로는 조금은 무례했던 할아버지와 달리 순자는 당당하고 따뜻하고 유머러스했다. “왜 울어. 멸치 때문에 울어?” “오줌 좀 먹으면 어때. 재밌었어.” 배우 윤여정이기 때문에 한껏 살릴 수 있는 역할이었다.
 
젊은 세대들이 윤여정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녀의 삶과 배우로서의 여정이 주는 은근한 감동과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나온 삶의 숱한 굴곡들, 그 굴곡 속에서도 배우로서 보여주는 꾸준함, 때로는 변화나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당당함까지도. “라떼는 말야”를 시전하는 ‘꼰대’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 속에 그녀는 “나도 67세는 처음이야”라는 어록으로 솔직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야”라며 할머니처럼 청년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윤여정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 아시아인으로서 두 번째다. 그녀의 수상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청년들에게 뜻깊은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나이 듦에 대한 기대를 심어준다는 점이다. 원더풀 할머니, 원더풀 윤여정!  
 
박해리 정치국제기획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