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은 반도체 독주 체제를 누렸다. 반도체 기술의 종주국인 미국이 1980, 90년대 들어 일본과 한국에 잇따라 메모리 반도체 생산의 주도권을 내주면서다. 컴퓨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설계는 미국이 주도하되 메모리 반도체는 굳이 직접 생산하지 않겠다는 전략이었다. 한국·일본이 경쟁해 값싸게 만들어 주면 사다 써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판을 바꾸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미국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세계 열강 모두 반도체 생산 나서
삼성전자 1등도 신기루 될 수 있어
국민 힘 모아 반도체 산업 지킬 때
중국이 2050년 경제력과 군사력 모두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중국몽 선언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반도체 생산 능력은 중국이 추구하는 패권 도전의 마지막 관문이다. 반도체가 미·중 경쟁의 게임 체인저라는 얘기다. 이 여파로 반도체 한국이 누렸던 독점 체제는 언제 신기루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당장 미국은 반도체의 직접 생산에 나섰다. 500억 달러의 재정을 투입해 반도체 인프라를 확충하고, 마이크론·인텔 등 미 기업들도 공격적 투자를 시작했다. 미국은 이와 함께 메모리 반도체 1위 삼성전자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 1위 대만 TSMC의 미국 내 투자 유치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반도체 생산의 핵심 기술을 가진 만큼 이들 기업이 미 정부의 요청을 모른 체할 수 없다. 지난 12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백악관 반도체 회의에서 웨이퍼를 흔들며 “반도체는 우리의 인프라”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중국을 향한 전면전의 선포다. 미국은 나아가 통신 장비에서 운영 체제를 분리하는 ‘오픈 랜’을 도입해 화웨이의 위력을 무력화하려고 한다. 이 싸움이 끼인 삼성전자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게 됐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사령탑이 국정 농단에 휘말려 옥에 갇혀 있다. 세계를 무대로 뛰고 전략회의를 거듭해 생존 전략을 짜내야 할 골든타임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중이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중국 공산당의 견제를 받아 힘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알리바바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것과 비유하면 이해하기 쉬운 상황이다.
우리는 삼성전자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봤다. 하지만 최근 국제 정세로는 그 믿음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게 됐다. 당장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TSMC를 제치고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세계 1위가 되겠다는 계획부터 불확실성이 커졌다. TSMC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옥에 갇히는 날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에 부응해 2024년 완공을 목표로 미 애리조나의 파운드리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일본은 자존심을 버렸다. 일본 내 파운드리 건설 요청을 TSMC가 거절하고 애리조나를 선택하자 연구개발센터라도 지어 달라고 해 최근 합의에 이르렀다. 이 거대한 반도체 공급망의 지각변동은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우리는 삼성전자의 1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세계열강이 반도체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기업의 힘만으로는 반도체 기득권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온 국민이 힘 모아 반도체 한국을 지켜야 할 때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