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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자산어보 이후 200년

중앙일보

입력 2021.04.1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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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문화팀 부장

요즘 극장 상영 중인 이준익 감독의 흑백사극 ‘자산어보’는 손암 정약전(1758~1816)이 흑산도 유배 생활 중 남긴 어류박물지 『자산어보』에서 모티브를 땄다. 정약전은 책 서문에서 “흑산(黑山)이란 이름이 어둡고 처량해 두려운 느낌을 줘서 비슷하게 어둠을 뜻하는 ‘자산(玆山)’으로 대신 쓴다”고 밝혔다. 대체로 ‘자산’으로 읽지만 일각에선 ‘검을 현(玄)’을 두 개 포갠 ‘현산’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약전의 책을 꼼꼼하게 재해석한 『현산어보를 찾아서』(총 5권, 2003년 완간)의 저자 이태원씨(서울 세화고 생물학 교사)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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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서른 안팎에 책을 쓰며 『자산어보』 서문에 등장하는 인물 창대의 계보도 추적했다. 정약전은 창대를 일러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영화에서 변요한이 연기한 어부 창대는 우여곡절 끝에 과거 급제하고 정약용의 『목민심서』 정신을 구현하려다 좌절하는 걸로 나오지만, 이는 허구다. 오히려 창대 집안에 내려온 이야기는 이렇다. “하룻밤에 사서삼경을 다 외울 정도로 총명했던 이가 어느 순간 총기를 잃고 편지도 남의 손으로 빌려 쓸 지경이 됐다더라.” 근해의 동·식물 200여종에 대해 꼼꼼한 이해를 도운 20세(추정) 청년의 재능이 서해의 절해고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든 것이다.
 
이 같은 신세는 서학 죄인으로 찍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정약전 뿐 아니라 그의 책도 마찬가지. 현재 전하는 『자산어보』는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고려대 등에 소장된 필사본 몇권뿐이다. 인쇄본 보급은커녕 소수가 돌려보다가 책장에서 대물림된 게 전부였으니 『자산어보』에 그 어떤 실용지식이 있었던들 백성들 삶을 낫게 하는데 기여할 수 없었다. 영화에서 보이는 19세기 조선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 이렇게도 증명된다.
 
“젊었을 때 정약전 책을 처음 접하고 ‘우리에게도 이런 게 있었구나’ 감격하고 자부심을 느꼈다. 세월이 지나니 이런 책과 사상이 간헐적으로 나왔다가 묻히기를 반복했던 당대 체제의 한계가 더 눈에 들어온다.” 이번 영화에 자문위원으로도 참여한 이 씨의 말이다. “문제는 지금도 별로 안 다르단 점이다. 학교에서도 수능 문제풀이가 우선이지 정약전이니 한반도식 생물학 역사니 하는 걸 거들떠볼 틈이 없다. 소수는 출세길로 나아갈지 몰라도 나머지는 패배자가 돼버린다.” 그의 교실에서 혹시 21세기의 창대가 시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또 다른 정약전이 은거지사로 묻히고 있는 건 아닌가. “사극은 시대를 보는 거울”이라는 이준익 감독의 말이 새삼스럽다.


강혜란 문화팀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