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미·중 정부가 국내 기업에 투자와 협력을 압박하는 가운데, 정작 한국에서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개별 기업만 등장할 뿐 ‘정부 역할’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패권’ 진단 전문가 5인 인터뷰
“제조업 휘청거리자 반도체 전쟁 시작
삼성·하이닉스 파운드리 역량 모으고
정부는 전면 나서기보단 인재 키워야”
현 상황 “미국은 필수, 중국은 선택”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미국은 필수고, 중국은 선택”이라며 “한국은 미국과 손잡지 않으면 반도체 산업의 존립이 불가능하지만, 중국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우리 반도체를 사가는 관계”라고 설명했다.
명백한 미국 우위 상황에서 한국이 중국 눈치를 보는 이유는 시장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의 반도체 수출 물량 중 중국 비중은 39.6%였다. 중국의 반도체 장비업체인 화웨이는 최근 5년간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으로부터 40조원어치의 반도체를 구매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중국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시장인 셈이다.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은 “한국이 중국을 자극해 시장을 잃는 선택을 해선 안 된다”며 “미국과 중국 두 개의 시장을 동시에 손에 쥐고, 국익을 이끌어내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전쟁 배경 “반도체 부족해 제조업 휘청”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반도체 부족이 결국 자동차·PC·스마트폰 등 국가의 기반 산업인 제조업의 근간을 흔드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를 ‘21세기 석유’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계 1·2위인 대만 TSMC와 삼성전자를 ‘제2의 OPEC(석유수출국기구)’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기현 전무는 “반도체 패권 전쟁의 실체는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라며 “한국 역시 반도체 대란에 국내 제조업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갈등이 한국에 외려 기회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대표(전 삼성전자 사장)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따라잡으려는 중국의 추격을 미국이 눌러주면서 한국에 시간을 벌어주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미국의 견제가 유지되는 앞으로 4~5년간 한국은 숨 쉴 틈을 얻으면서 격차를 벌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홍성철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역시 “반도체 기술은 무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첨단의 끝’에 이르게 된다”며 “지금은 기술우위에 있는 한국 역시 시간이 흐르면 기술의 벽에 막혀 후발주자인 중국에 따라잡힐 가능성이 큰데, 미국이 그 시간을 벌어준 셈”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美 투자 결정 앞당겨야”
정부 역할은 기업 지원에 한정돼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 정부가 전면에 나섰다간 자칫 기업에 이중, 삼중의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 차세대반도체특별법 검토해야”
이종호 소장은 “반도체는 정치 이슈가 아닌 경제 이슈”라며 “정부는 기업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기업 활동을 돕고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박형수·최현주 기자 hspark9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