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철도 건설 현장에 1000명 가까운 한국인(당시는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 더구나 그 가운데 상당수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철도 공사를 지휘한 것은 일본군 철도대(鐵道隊)였지만, 포로수용소 관리와 동원·인솔 등의 역할을 한 것은 ‘포로감시원’이란 직책을 부여받은 한국인 군무원들이었다. 일제는 한국인 젊은이 3000여명을 뽑아 군사훈련을 시킨 뒤 태국·자바·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전선에 보내 포로감시 임무를 전담시켰다.
포로들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식사로 인한 영양실조, 전염병과 열대성 풍토병에 시달렸다. 30만명으로 추산되는 동남아 전선의 포로 4명 가운데 1명이 숨졌고, 그중에서도 태국~미얀마 철도에 동원된 포로의 희생률은 단연 높았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점령군과 포로의 입장이 맞바뀌었다. 연합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범을 체포해 재판에 넘기는 일이었다. 전범은 A·B·C의 세 등급으로 분류됐는데 실제 전장에서 체포된 일본군과 군무원의 다수는 포로학대 혐의로 B급 혹은 C급 전범으로 기소됐다.
조선인 중에서도 148명이 B·C급 전범으로 기소됐고 23명은 사형됐다. 기소자 가운데 125명은 포로감시원이었다. 그 속에 태국에서 포로감시원을 하던 전남 보성 태생의 이학래(당시 20세)씨도 포함돼 있었다. 포로였던 연합국 군인 중 누군가가 “저 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고 지목하면 꼼짝없이 용의자로 체포되는 방식이었다. 이 씨는 1차 조사에서 기소 각하 결정을 받고 귀향길에 올라 홍콩까지 왔다가 재체포되어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에 수감된 뒤 사형판결을 받았다.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그는 20년 징역으로 감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히로무라(이학래의 일본식 이름)는 사형에 처할 만큼의 학대를 하진 않았다”는 누군가의 진술이 그제서야 받아들여진 것임을 훗날 알게 됐다.
이 무렵부터 이 씨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됐다. 이 씨를 비롯한 조선인 전범 생존자들은 동진회(同進會)를 결성하고 조선인 전범도 동등하게 구제조치를 해 줄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시간을 끌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의 체결로 모든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는 논리로 거부했다.
17세에 일본군 포로감시원 동원
B급 전범 기소, 사형선고 뒤 감형
아직 이루지 못한 보상ㆍ명예회복
"정의는 무엇인가" 물음 남기고 별세
이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이학래씨는 지난달 28일 9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나흘 뒤 국회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외국인 전범자 조기 해결을 위한 모임’에서 영상 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다. 이날 행사는 자연스레 이학래 추도회가 되고 말았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인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자민당 의원은 “다시 한번 입법 절차를 진전시켜 나가고 싶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를 이대로 끝낼 수 없다”며 의지를 보였다.
이 씨를 비롯한 B·C급 전범의 행위는 가해자적 측면과 피해자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포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가해자였다. 비록 자신의 의지로 적극적 학대행위를 한 기억은 없고, 일제 군부의 최말단에서 상부 지시대로 임무 수행을 한 것이라고는 해도 책임은 회피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필자와 만났을 때 한 구술이나 회고록·인터뷰 등에 따르면 이 씨는 평생 부채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감을 갖고 살았다.
이 씨는 1991년 8월 일본인 연구자의 주선으로 용기를 내 호주에 갔고, 심포지엄에서 공개 사죄를 했다. 그가 관리하던 포로이자 그를 고소했던 사람을 만나 사죄하고 화해의 악수를 했다.
하지만 B·C급 전범들은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 일제의 피해자였다. 17세에 포로감시원이 된 이 씨의 경우처럼 인원 할당을 받은 면사무소의 강요와 어차피 징용 또는 징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지원한 ‘반강제’적 사례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한국 정부는 2006년 B·C급 전범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로 공식 인정했다. 이학래씨가 생전 가장 기뻐한 것은 당시 라종일 주일대사로부터 피해자 인정서를 받았을 때였다.
이로써 그가 품고 있던 조국 한국에 대한 부채의식을 약간은 덜 수 있었다. 그는 “같은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일본군을 도운 것이 사실이었다. 변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1956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에도 오랫동안 한국 땅을 밟지 못했던 이유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굽이칠 때마다 예기치 않은 희생자가 생겨난다. 힘과 이념, 탐욕이 국가권력을 움직이고 인간의 이성을 지배하는 시기일수록 나약한 개인은 역사의 제물이 되기 쉽다. 식민통치와 전쟁의 비극을 헤쳐나온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씨와 같은 운명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평생 전범 낙인을 안고 산 이학래씨는 한국인 B·C급 전범 148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위안부, 강제징용 등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문제가 남아 있지만 B·C급 전범 문제 역시 역사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사례중 하나다. 지난 7일 아사히 신문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의 각성을 통렬하게 촉구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 나라의 정의와 양식은 무엇인가. 정치의, 그리고 정치의 부작위(不作爲)를 못 본 체해 온 국민의 책임을 묻는다. ”
오랜 기간 이학래씨의 조력자였던 최봉태 변호사는 같은 질문을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에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국민이 외롭게 수십년 동안 명예회복을 위해 싸우는 동안 한국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이학래씨가 한국 헌법재판소에 낸 헌법소원은 7년째 잠들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