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미·중 신냉전, 군사 대결 아닌 기술 전쟁 5G·반도체·항공에서 벌어졌다.

중앙일보

입력 2021.04.08 02:09

수정 2021.04.0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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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재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중국 화웨이의 5G 핸드폰. 제재 이후 화웨이 핸드폰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20%에서 8%로 떨어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3월 인도·태평양 4개국 안보 연합체(Quad·쿼드)의 첫 정상회의가 열렸다. 국내의 관심은 주로 안보 문제에 쏠렸었다. 중국 견제를 위해 모인 미국·일본·호주·인도 등 이 지역 강자들이 남중국해 내 항해의 자유 및 북핵 문제 해결 등을 위해 어떤 군사적 협력 방안을 내놓을지가 관심사였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눈길은 정작 다른 곳을 향했다. 미국 주도로 이들 네 나라가 첨단 분야에서의 중국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어떤 기술적 협력 방안을 끌어낼 것인가에 이목이 쏠렸던 것이다. 국내에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네 나라는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쿼드기술네트워크(QTN)'를 출범시키고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2일(현지시각)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함께 쿼드 첫 정상회의를 열었다. [AFP=연합뉴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자 미국이 트럼프 시대에 벌여왔던 중국과의 무역 분쟁 및 기술 갈등을 계속할지, 전 세계적인 궁금증을 자아냈다. 처음에는 미국 우선주의에 사로잡힌 트럼프와는 달리 바이든은 대중 제재를 풀어줄 거라는 관측이 많았다. 미국 일방주의자가 아닌 데다 시진핑 주석을 비롯한 중국 고위층과의 교류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바이든은 제재를 풀기는커녕 대중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심지어 쿼드 회의 바로 전날인 지난달 11일 중국 당국의 스파이 활동을 도운 혐의를 받는 정보통신회사 화웨이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미국은 화웨이는 물론 이 회사에 민감한 5G(5세대 이동 통신) 관련 기술이나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 역시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바야흐로 미국과 중국 간에 치열한 '신(新)냉전'이 날로 격화하는 형국이다. 현재 진행 중인 미·중 신냉전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계속됐던 미·소 간 냉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과거에는 핵무기 등 안보 문제를 둘러싼 경쟁이었지만, 신냉전은 과학기술을 놓고 벌어지는 혈투다. 전쟁에 휘말릴 위험은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국가의 흥망에 더 중요하다. 미국이 이 기술 전쟁에서 지면 최강국의 지위를 내줘야 하며 중국으로는 세계의 리더로 도약할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이든은 이번 대결을 '기술 민주주의 (Tech Democracy)' 대 '기술 독재주의 (Tech Authoritarianism)' 간의 싸움이라고 규정하며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미국이 이렇듯 강하게 나오는 건 위기감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중국에 추월당한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 냉전 때 미국을 위협했던 소련은 경제가 가장 좋았을 때도 미국 GDP의 40% 남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은 오는 2028년이 되면 GDP 규모에서 미국을 넘어설 거로 예상된다. 여기에 경제 규모에 걸맞은 군사력까지 갖추면 중국은 미국을 위협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이든은 지난달 말에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 중국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기술 투자를 늘림으로써 우방국과 함께 중국이 세계를 리드하고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는 것을 저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런 미국의 중국 견제 전략은 5G(5세대 무선통신)를 시작으로 반도체, 인공지능(AI), 퀀텀 컴퓨터, 가상현실(VR), 항공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첨단기술 분야에 걸쳐있다. 
 
5G
지난 2017년 트럼프의 첫 제물은 5G의 선두주자인 화웨이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화웨이가 5G 교환기에 정보를 빼낼 수 있는 백도어(Back Door)를 설치한 뒤 민감한 국가 기밀을 중국 당국에 넘겨줄 위험이 있다며 수입규제 대상에 올렸다. 화웨이에 기술과 부품을 제공하는 업체들 역시 제재했다. 그러면서 한국을 포함, 우방국들에 화웨이 제품을 쓰지 말라고 협조를 요청했다. 퀄컴·인텔 등 핵심 부품을 공급해온 미국 회사들이 공급을 끊자 화웨이는 첨단 제품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결과는 비참했다. 지난해 2분기만 해도 전 세계 핸드폰 시장의 20.2%를 차지했던 점유율은 4분기 들어 절반에도 못 미치는 8.6%로 떨어졌다. 
미국이 유독 5G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5G야말로 향후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 원격진료 및 가상현실 등 미래 유망산업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5G 기술에서 뒤처진다면 4차 산업혁명에서 승자가 될 수 없다. 

'기술 민주주의' 대 '기술 권위주의'
쿼드 4개국, 기술네트워크 발족해
바이든, 중국의 부국화 저지 선언
중, 대만 반도체 인력 빼오기에 혈안

세계 최대의 바운드리 반도체 생산업체인 대만의 TSMC 본사. [AFP=연합뉴스]

반도체
5G 이상으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 분야가 반도체다. 이제 반도체는 컴퓨터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첨단 제품에 들어가 '전자산업의 쌀'로 불린다. 반도체 없이는 웬만한 가전제품조차 못 만든다는 얘기다. 급격한 경제 성장을 거듭해온 중국은 당연히 어느 나라보다 반도체 수요가 많다. 그런데도 자급률이 30% 남짓이어서 매년 3000억 달러 (330여조원) 어치 정도를 수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지난해 9월, 무기 개발 등에 사용한 혐의가 있다며 중국의 최대 반도체 업체인 SMIC에 대해 제재를 내렸다. 미국 업체들의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의 전자 산업은 물론 다른 관련 업계 모두가 반도체 기근에 허덕이는 처지가 됐다.
게다가 전 세계 15대 반도체 업체 중 8개가 미국 회사다. 바이든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반도체 금수(禁輸)를 통해 중국에 결정타를 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이 자체 개발해 2017년 첫 선을 보였던 중형 여객기 C919가 지난해 10월 중국 난창공항 활주로에 서 있다. [신화사=연합뉴스]

 
항공산업 
항공산업에서의 기 싸움도 만만치 않다. 막대한 항공 수요로 오래전부터 중국은 여객기의 국산화를 추진해왔다. 그 덕에 지난 2017년 중국상용항공기(COMAC)가 첫선을 보인 중형항공기 C919가 정규 노선에 투입됐다. 그러나 문제는 안정적인 엔진까지는 개발하지 못해 미국·프랑스 합작 회사인 CFM의 제품을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말 미국은 COMAC의 자회사 몇몇이 군용기 생산에 가담했다고 이들 업체에 대한 제재를 취했다. 항공산업에서의 미·중 갈등 역시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은 불이 옮겨붙지 않았지만 언제든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 AI, VR과 슈퍼컴퓨터 분야다. 모두 국가의 경쟁력을 가를 최첨단 분야인 터라 미국은 기회만 되면 제재를 가해 중국의 성장을 막으려 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불붙기 시작하던 2018년 4월 26일, 시진핑(習近平·67) 중국 국가주석이 반도체 공장 우한신신(武漢新芯·XMC)을 방문해 현황을 보고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의 대응
이런 미국의 공세에 중국이 가만있을 리 없다. 시진핑 정권이 택한 전략은 '기술 자립'이다. 중국의 가장 중요한 행사라는 올 양회(兩會)의 핵심 주제가 바로 기술 자립이었다. 지난달 4일부터 일주일간 열린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에서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2035년까지 ▲AI ▲퀀텀 컴퓨터 ▲반도체 ▲뇌과학 ▲유전자 및 바이오기술 ▲ 우주·심해 탐사 ▲임상의학 및 헬스케어 등 7대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10년 동안 한 자루의 칼을 가는 심정으로 핵심 영역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수출 및 기술 이전 금지를 대체재 개발로 맞서자는 얘기다.  
이런 전략을 택한 터라 중국은 가장 급한 반도체 개발에 혈안이 돼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인력 빼 오기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은 수년 전부터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에서 핵심인력을 스카우트해 우한에서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어쨌든 중국은 2025년까지 반도체 자체 생산 비율을 70%까지 끌어올린다는 '반도체 굴기'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미·중 표준전쟁에 낀 한국의 해법은
 미·중 간 기술 전쟁이 격화되면 될수록 중간에 낀 한국의 입장은 난감해질 수밖에 없다. 첨단 제품 수출과 기술 이전을 중단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듣자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무시할 경우 제재를 받을 위험이 있다. 이뿐 아니라 중국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 자체적인 첨단 기술에 매진하면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두 개의 표준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로봇, 3D 프린터, 사물인터넷 등 아직 뚜렷한 표준이 없는 분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럴 경우 한국은 어떤 쪽을 택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의 최대 시장이 중국인 점을 고려하면 중국 표준을 따르는 게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경제 외적 요인을 고려한다면 미국이나 유럽, 또는 일본에서 개발한 기술을 표준으로 삼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려되는 건 중국의 인력 빼 오기다. 삼성과 하이닉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업체이며 같은 유교 문화권에 위치한 회사다. 중국 입장에선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다. 중국 업체들은 이미 옛 연봉의 3~4배를 주면서 한국 인력을 스카우트해왔다. 미·중 간 대결이 심화할수록 자기편을 들라는 압력이 심해지는 건 물론이고 한국 인력 스카우트 바람이 불 가능성도 크다.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