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중앙시평] 그의 가치, 그의 가격

중앙일보

입력 2021.04.06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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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작가·『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10여 년 전, 나는 칼럼에 이렇게 적었다. “보수 부모의 교육 목표는 아이가 일류대 학생이 되는 것이다. 진보 부모의 교육 목표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 학생이 되는 것이다.” 또 이렇게도 적었다. “보수 부모는 편안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고, 진보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당시만 해도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은 교육 문제에서 상당한 대립 상태에 있었다. 보수의 교육관은 입신양명이라는 전통적 관념에 시장주의가 결합한 것이었다. 진보의 교육관은 교육 민주화와 인간 교육이라 할 수 있었는데, 후자엔 시장주의 경쟁에 대한 반대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말과 글의 차원이었을 뿐, 실제 제 아이 교육에선 보수 부모를 넘어설 만큼 시장주의 경쟁에 적극적이었다.

보수 부모와 진보 부모의 대통합
민주화와 자본 독재로 이행
정의가 가격 공정성에 멈춰설 때
상품 생산인가 인간 성장인가

내 이야기는 진보 부모의 그런 위선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윤리를 논하려는 것보다는, 윤리 현상으로 드러나는 현실의 본질을 짚으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교육 문제를 두고 대립과 긴장을 유지해온 보수와 진보의 시장주의 교육으로 대통합은, 민주화 후 20여 년 시점의 한국 사회의 실체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을 비롯한 민주화의 경험을 가진 사회에서 민주화란 대개 두 가지 내용을 가진다. 하나는 독재나 전제정에서 벗어나 정치적 민주주의를 얻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본화, 즉 경제를 주도하는 힘이 국가에서 자본과 시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민주화라고 말할 때 주로 전자를 의미한다. 독재나 전제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르며, 그만큼 벅찬 기쁨을 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민주화 이후, 어떤 사회를 만드는가이다.
 
많은 경우 민주화는 전자의 의미에 매몰되어 후자로 휩쓸려 들어간다. 정치적 독재가 민주화를 통해 자본의 독재로 이행하는 것이다. 민주화로 좋은 세상이 온 줄 알았는데, 다수 민중의 삶은 갈수록 더 고단하고 앞이 안 보이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진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젠가 이와 관련하여 짐짓 자조적으로 말한 바 있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걸 주도하고 그에 수반하는 기득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된 건 그가 믿은 86 세력이었다.


한국이 좀 더 특별했던 건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1980년대 이후 서구 사회를 휩쓴 강력한 시장주의 바람(신자유주의라 불리는)이 민주화를 통해 빗장을 열고, 97년 구제금융 사태를 계기로 해일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등에 업고 진행된 자본화는 그 속도와 강도에서 유례없었다. 동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도 그즈음이다. 아이들은 늦은 시간까지 학원을 돌고 있었다. 그 풍경은 내가 어린이교양지 『고래가그랬어』를 창간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좋든 싫든 삶에서 자본의 논리를 온전히 거스르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삶에서, 인간의 사회에서 자본의 논리만 적용해선 안 되는 것들이 있음을 안다. 교육은 그 대표적인 부문이다. 교육이 자본의 논리, 시장 논리로만 이루어지면 교육은 ‘인간 성장’이 아니라 ‘상품 생산’ 공정이 된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보다 ‘얼마 짜리가 될 것인가’에 더 집중하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가격으로만 표현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아이는 어떤 형태로든 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정의는 상품의 정의로 재구성되고, ‘가격 공정성’으로 축소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여러 공공 부문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논리가 그것이다. 우리라는 상품과 저들이라는 상품은 엄연한 가치 차이를 가지며, 정규직 입사시험은 그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다. 전혀 다른 가치를 갖는 두 상품이 같은 가격을 갖는 건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한국보다 경제 선진국이며, 아이들과 노동자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듣는 사회들이 교육을 자본 논리에 내맡기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 인간의 가치가 그의 가격으로만 표현되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서 사회가 상품과 상품의 관계로 대체되는 건 미래의 지옥을 만드는 일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하의 출산율을 보이는 사회가 되고, 청년들이 제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한국이 ‘부자 나라’라 불리게 된 직후였다. 코로나19 사태와 방역의 긴장으로 잠시 유보된 우리의 진실이다.
 
조국씨의 교육 행태가 드러나 여론이 들끓자, 86 세력의 상당수가 ‘안 그런 부모가 있는가’라고 옹호함으로써, 그간 말과 글로 감춰 온 그들의 교육 실상을 제풀에 드러냈다. 그들의 위선과 염치없음에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분노가 여전히 상품으로서 정의, 가격 공정성에 기반한다면 현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교육은 단지 상품 생산인가, 인간의 가치는 단지 그의 가격인가 물어야 한다. 아이는 왜 공부하는가, 함께 물어야 한다.
 
김규항 작가·『고래가그랬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