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중 간의 대국은 서로 진지를 구축하고 세력을 쌓는 포석전의 단계다. 머지않아 포석이 끝나고 중원(中原)에서의 전투가 시작되면 외줄을 타며 기계적 균형을 유지한다는 한국의 전략은 말 그대로 지난(至難)의 업(業)이 될 것이다. 끝까지 판을 지켜보다 승자가 결정되면 그때 선택하면 된다는 생각도 극히 안일한 발상이다.
지난 주말 워싱턴과 샤먼에서 열린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와 한·중 회담 결과는 그런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일깨워주었다. 무역전쟁으로 시작된 미·중 충돌은 당장 우리 먹거리와 관련된 과학기술 분야로 전선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해 중국을 압박하려 한다. 중국은 중국대로 한국과 5G·인공지능·빅데이터 분야의 기술협력 의지를 드러냈다. 미국 위주의 반도체 공급망 편성을 견제한 것이다. 이제 미·중 충돌은 정부에만 닥친 일이 아니다. 당장 삼성전자가 백악관에서 열리는 반도체 공급망 관련 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단기적으로야 차량용 반도체 품귀현상을 빚고 있는 미국에서의 생산·판매를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만 미국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미·중 패권경쟁이 군사 충돌을 동반하는 열전(熱戰)으로 가지 않는 이상, 궁극적으로는 기술경쟁이 최후의 승자를 판가름지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 중심에 반도체 수급이 있다. 반도체는 고부가가치 상품의 차원을 넘어 패권경쟁의 향방을 좌우하는 전략물자다.
이처럼 안보와 경제가 일체화되면 한국의 안미경중(安美經中) 전략이 설 자리는 사라지고 만다. 실은 미·중 충돌 이전부터 안미경중은 언젠가는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국 스스로가 ‘경중’에만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1992년 수교 이후 분업화된 산업 구조를 바탕으로 한 경제협력이 한·중 관계를 이끌어 오면서 양국 모두에 이득을 안겨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을 교역 대상 혹은 경제협력의 파트너로만 보지 않는다. 한국에 있어 중국은 여전히 압도적 비중의 최대 교역국이긴 하지만 시진핑 정부가 한·중 관계에 공을 들이는 건 한국의 투자와 기술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포함한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미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체계 배치를 둘러싼 갈등과 경제보복을 통해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해 온 이분법적 구도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중국의 당면 목표는 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대중(對中) 포위망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내심으로 바라는 궁극의 목표는 안중경중(安中經中)일 것이다. 그게 지금 당장은 가능하지 않기에 한국으로 하여금 최대한 중립을 지키도록 요구한다. 중국의 중립 요구는 ‘동맹중독증’이란 셀프진단을 내린 국립외교원장과 같은 이들의 정세 인식과 잘 부합한다. 문재인 정부의 줄타기는 그렇게 내려진 처방전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얼마나 아슬아슬한 게임인지 우리는 지난 주말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