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부터 웍을 잡고 주방을 호령했던 이들의 우정은 60대까지 이어졌다. 이연복 사부는 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무슨 일을 겪어도 한결같은 분이 곡 사부와 왕 사부”라며 “우리는 삼총사같이 서로 척하면 착 통하는 사이였다”고 고인을 애도했다. 왕 사부도 통화에서 “1977년 만나 인생을 쭉 같이 해왔다”며 “둘 다 무일푼이었지만 요리에 대한 꿈으로 하나가 됐다”고 회고했다.
19세에 서울 5대 중식집 주방장
‘짬뽕·탕수육의 달인’ 이름 날려
왕 사부와는 신촌 만다린에서 만났다. 왕 사부는 “3층 이상 되는 만다린 같은 곳을 차리고 말 거라는 포부가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한창때 모두 13개 지점을 운영했다. 이연복 사부는 “의지가 대단했고 실력으로 일을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요리인으로서 곡 사부는 재료로 승부를 봤다. 그는 생전 “요리는 재료 80%, 기술 20%”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택희 음식문화탐구가는 “곡 사부는 아침마다 돼지고기를 도축장에서 직접 받는 걸 원칙으로 했는데 냉장차에서 돼지고기를 내린 후 손을 대보고 심하게 차가우면 돌려보냈다”고 소개했다.
상해루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곡 사부가 직접 걸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냉장 저장고였다고 한다. 이택희 음식문화탐구가는 “샥스핀부터 해삼까지 각종 진귀한 재료들을 간직한 보물창고였다”고 추억했다.
곡 사부에게 대중적 인기를 안겨준 데는 동생들의 역할이 컸다. 중화요리 업계의 트렌드가 바뀌면서 곡 사부가 고전했던 때 이연복 사부가 방송 출연 다리를 놓아줬고, 이후 곡 사부는 ‘짬뽕의 달인’ ‘탕수육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사문·사달 형제 등이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일 오전 10시.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