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박정호의 문화난장] 이석영·회영 6형제가 남긴 뜻

중앙일보

입력 2021.04.01 00:32

수정 2021.04.0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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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서거 111주기를 맞은 지난달 26일 문을 연 남양주시 '리멤버 1910' 체험관에 마련된 역사법정 공간, 왼쪽부터 각각 이회영,이석영,이시영 형제 조각상이다. 박정호 기자

석창우 화백이 큰 붓을 들어 붉은색 물감을 찍었다. 바닥에 놓인 종이에 자전거 6대를 힘차게 그려 내려갔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검은색 자전거를 쓱쓱 그렸다. 지난 금요일(26일) 유튜브로 생중계된 ‘1910년 고난의 망명길’ 수묵화 퍼포먼스다. 석 화백은 또 이렇게 썼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신약 로마서 8장 28절의 한 구절이다.
 이날 퍼포먼스는 ‘이석영 광장과 리멤버(REMEMBER) 1910’ 개관식의 일부였다.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 앞에 독립지사 이석영을 기리는 광장과 역사체험관이 조성됐다. 이석영은 1910년 12월 가산을 털어 이회영·시영 등 6형제와 함께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리멤버 1910’ 지하 역사체험관에 재현된 안중근 의사의 중국 뤼순 감옥 수감실. [중앙포토]

 마침 이날은 안중근 의사의 서거 111주기였다. 의수(義手) 화가인 석 화백이 발바닥 낙관을 찍었다. “붉은 자전거는 6형제를, 검은 자전거는 함께한 동지들을 가리킵니다. 저는 감전사고로 두 팔을 잃었어요. 단지(斷指) 동맹을 맺고 ‘대한국인’ 손도장을 찍은 안 의사도 기억합니다.”
 이날 오후 체험관 현장을 찾아갔다. 건물 외벽 거울에 ‘여섯 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가 적혀 있다. 6형제의 이주 소식을 들은 사회운동가 이상재가 남긴 말이다. ‘생과 사는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라는 이회영의 경구도 매서웠다.
 지하 체험관으로 내려갔다. 독립유공자 이름을 붉은 벽돌에 새긴 ‘독립의 계단’이 손님을 맞는다. 안중근 의사의 뤼순(旅順) 감옥, 친일파 수감 감옥이 재현됐고, 가상 역사법정·미디어홀·콘퍼런스홀 등이 구비됐다. 하늘에서 내려온 손과 땅에서 솟아난 두 손이 만나는 설치물 ‘빛을 잇는 손’이 신비로웠다.

‘리멤버 1910’ 지하 역사체험관에 조성된 설치물 '빛을 잇는 손'. [중앙포토]

 이석영 일가가 소유했던 토지 현황 전시패널도 살펴봤다. 수도권 일대에 882만㎡(2021년 현재 가치 2조원 이상)에 이르렀다. 그중 대부분인 남양주 땅 833만㎡를 이석영이 갖고 있었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쓴 이덕일은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자고 형제들을 설득한 이는 이회영이지만 그들이 당시 약 40만원의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고 평했다.
 새로 빚은 광장과 체험관을 둘러보는 느낌은 여러 갈래였다. 한 세기 전의 아픔과 슬픔은 둘째 치고, 위기의 오늘을 헤쳐가는 지혜를 묻고 싶었다. 나라를 잃은 고종·순종의 황제릉인 홍유릉과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 분투한 6형제 기념관이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지금 그들이 다시 만난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이회영은 1907년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만방에 폭로하려 했던 헤이그 밀사사건의 기획자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맞은편에 있던 예식장을 허물고 새로 지은 '이석영 광장과 리멤버 1910' 역사체험관 외부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활동을 재조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흘러간 역사에 대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 대한 냉철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런 면에서 새 기념관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단죄에 무게를 실었다. 6형제의 고뇌와 결단, 그들의 투쟁과 과제를 짚어보는 콘텐트가 부족했다. 역사의 기억도 중요하지만 앞날을 다지는 비전 제시가 요청됐다. 콘텐트 확충은 여타 지자체 문화공간의 공통된 숙제이지만 말이다.
 요즘 동북아에 역사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일방적 중화주의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조선구마사’가 한국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폐기됐다. 중국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소수 민족인 조선족의 항쟁으로 제한하려 하고 있고,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교과서 왜곡을 부채질하고 있다. 감정적 대응을 넘어선 우리의 현명한 판단이 절실한 시점이다.
 신주백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의 조언이다. “1980~90년대만 해도 중국에선 한·중 공동 항일투쟁을 높게 평가했다. 이석영 6형제의 활동도 중국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은 공동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오히려 우리가 강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정확한 팩트를 연구·제시하는 한국의 주도적 자세를 되새기게 한다. 
 일본에 대한 대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내놓은 동양평화론의 핵심도 바로 그곳에 있다. 편협한 국가·민족을 넘어서는 자유와 평화의 실현이다. 현실 정치가 못하면 양식 있는 시민이 손잡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