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퍼포먼스는 ‘이석영 광장과 리멤버(REMEMBER) 1910’ 개관식의 일부였다.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 앞에 독립지사 이석영을 기리는 광장과 역사체험관이 조성됐다. 이석영은 1910년 12월 가산을 털어 이회영·시영 등 6형제와 함께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펼쳤다. 특히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이날 오후 체험관 현장을 찾아갔다. 건물 외벽 거울에 ‘여섯 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가 적혀 있다. 6형제의 이주 소식을 들은 사회운동가 이상재가 남긴 말이다. ‘생과 사는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라는 이회영의 경구도 매서웠다.
지하 체험관으로 내려갔다. 독립유공자 이름을 붉은 벽돌에 새긴 ‘독립의 계단’이 손님을 맞는다. 안중근 의사의 뤼순(旅順) 감옥, 친일파 수감 감옥이 재현됐고, 가상 역사법정·미디어홀·콘퍼런스홀 등이 구비됐다. 하늘에서 내려온 손과 땅에서 솟아난 두 손이 만나는 설치물 ‘빛을 잇는 손’이 신비로웠다.
새로 빚은 광장과 체험관을 둘러보는 느낌은 여러 갈래였다. 한 세기 전의 아픔과 슬픔은 둘째 치고, 위기의 오늘을 헤쳐가는 지혜를 묻고 싶었다. 나라를 잃은 고종·순종의 황제릉인 홍유릉과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 분투한 6형제 기념관이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지금 그들이 다시 만난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이회영은 1907년 고종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만방에 폭로하려 했던 헤이그 밀사사건의 기획자였다.
요즘 동북아에 역사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일방적 중화주의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조선구마사’가 한국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폐기됐다. 중국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소수 민족인 조선족의 항쟁으로 제한하려 하고 있고,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교과서 왜곡을 부채질하고 있다. 감정적 대응을 넘어선 우리의 현명한 판단이 절실한 시점이다.
신주백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의 조언이다. “1980~90년대만 해도 중국에선 한·중 공동 항일투쟁을 높게 평가했다. 이석영 6형제의 활동도 중국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요즘은 공동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오히려 우리가 강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정확한 팩트를 연구·제시하는 한국의 주도적 자세를 되새기게 한다.
일본에 대한 대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내놓은 동양평화론의 핵심도 바로 그곳에 있다. 편협한 국가·민족을 넘어서는 자유와 평화의 실현이다. 현실 정치가 못하면 양식 있는 시민이 손잡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