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중국 측이 제안했다는 회담 장소다. 하이웨 호텔은 샤먼시 쓰밍취(思明區) 환다오난루(環島南路) 해안도로와 접해 있다. 동쪽으로 10여㎞ 바다를 건너면 대만이 관할하는 소금문도(小金門島)와 대금문도(大金門島)가 있다. 날씨가 화창할 때는 해안가에서 섬이 보일 정도로 지척이다. 회담장 동쪽으로 3.2㎞ 떨어진 해안가에는 “일국양제 통일중국(一國兩制 統一中國)”이 새겨진 커다란 입간판도 서 있다. 중국이 대만 등을 향해 '하나의 중국'을 강조할 때 쓰는 구호다.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화하면서 대만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회담 장소의 상징성이 작지 않다는 지적이다.
샤먼 회담장, 대만 금문도와 10km 거리
‘일국양제 통일중국’ 초대형 선전 간판도
마오쩌둥, 미·소·대만 이간 노려 금문 포격
미·중 '신 냉전'에 속 양안 긴장도 고조
하지만 마침 푸젠성에 태풍이 몰아쳤다. 19일간 큰비가 이어졌다. 포격전 준비가 곤란해지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잠을 설쳤다.
7월 27일 마오는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국방부장과 황커청(黃克誠) 참모장에게 편지를 썼다. “금문도 타격을 적당할 때까지 멈추자. 저들이 무리하게 진격하기를 기다려 반격하자.” 편지를 받은 펑더화이는 푸저우(福州) 군구예페이(葉飛) 정치위원에게 전달했다.
7월 29일부터 8월 22일까지 국민당 공군이 연안을 공습했다. 공산당 인민해방군과 네 차례 공중전이 벌어졌다.
8월 6일 국민당은 대만·펑후(澎湖·팽호)·금문도·마쭈다오(馬祖島·마조도)에 비상사태를 발령했다. 8월 19일 장제스(蔣介石)가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대동하고 금문도를 시찰했다. “금문아 금문아. 맨눈으로 직접 샤먼과 대륙 산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외쳤다. 현장 지휘관에게 전투 준비를 독려했다. 21일 대만으로 돌아갔다.
8월 23일 17시 30분 2600발의 포탄이 금문도 태무산(太武山) 진지를 타격했다. 금문도를 지키던 국민당 ‘국군’ 부사령관 3명이 즉사했다. 85분간 3만여발이 쏟아졌다. 20분 뒤 금문도 포대 역시 불을 뿜었다. 하지만 2000여 발에 그쳤다. 당시 금문도의 5만여 주민과 섬을 수비하던 국민당군 8만 명이 지하 방공호로 대피했다.
“대만·팽호·금문·마조 동포들.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다. 대만·팽호·금문·마조는 중국 영토다. 미국인의 영토가 아니다. 13만 금문 주민은 공급이 끊기고 굶주림과 추위가 덮칠 것이다. 오래 버티기 어렵다. 인도주의를 위해 이미 푸젠 전선에 10월 6일부터 7일간 포격을 멈추도록 명령했다. 자유롭게 보급품을 수송하라. 단 미국이 호위하면 안 된다.”
장제스도 비밀 채널을 통해 베이징에 메시지를 보냈다. “중공이 금문도 포격을 계속한다면 미국이 금문도와 마조도로부터 국민당군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중국의 영원한 분열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오의 편지는 장제스의 비밀 서신이 전해진 뒤 발표됐다.
금문도에 떨어진 중국발 포탄의 숫자는 대략 100만 발. 포탄의 쇠를 녹여 만든 금문도 식칼은 금문 고량주와 함께 한국인에게도 유명하다.
최근 미·중간 '신 냉전'이 격화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고 있다.
존 헤네시닐랜드 팔라우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28일 대만을 방문, 단교 후 42년 만에 대만을 방문한 대사가 됐다. 이에 맞서 중국이 군용기 10대를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진입시키는 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