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골에서도 ‘알아서 잘 자라는’ 미나리는 소박하고 여리지만 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 유배 초기 몇 년간의 강진읍성 생활을 마치고 숲속에 다산초당을 짓고 안착한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다산은 물을 막고 ‘사랑 아래다 새로이 조세 없는 밭을 일궈, 층층이 자갈을 쌓고 샘물을 가두었지. 금년에야 처음으로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워, 성안에 가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 농어국에 전복회에 이것저것 그득하며, 파 익히고 미나리 데치고 모두가 제격이었네’라고 읊었다.
한국인의 미나리 사랑도 꽤 오래됐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1430~1502)은 ‘조선부(朝鮮賦)’에서 ‘왕도와 개성 사람들은 모두 집의 작은 못에 미나리를 심는다’고 했다. 고려시대부터 사람들은 근전(芹田·미나리밭)을 운영했다. 이민구(李敏求·1589~1670)는 새해에는 ‘진흙 속 미나리와 들의 쑥에도 다 생기 돌고’ ‘미나리 진흙을 봄 제비가 물어 간다’고 노래했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주방의 여덟 가지 야채를 노래함’(廚蔬八詠)에서 ‘미나리는 예로부터 좋은 나물이라(芹子由來美) 아침 밥상에 국거리도 좋고 말고(晨盤亦可羹)’라고 찬미했다.
미(물)나리(나물)는 물이나 나물처럼 흔하지만 차가운 물에서도 얼음 밑에서도 자란다. ‘어름이 꽝꽝 언 논 속에서도 새파랗게 새싹이 난 미나리는 서울의 맛이었다.’ (1929년 9월 27일자 대중잡지 ‘별건곤’) 봄 땅의 흙내음과 시냇물의 은근하고 할머니 손처럼 포근한 향을 지닌 미나리는 가난한 시절 우리를 살찌운 (눈)물의 식재료였다.
박정배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