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얼굴’의 대마도
일본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대마도는 오지인 데다 생활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섬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덮여 있고 토질마저 척박하여 농업 생산은 몹시 빈약했다. 쌀을 비롯한 생필품을 자급할 수 없었던 대마도인은 일찍부터 가까운 조선에 손을 벌렸다. 교역을 하고 있던 와중에도 조선은 물론 중국 연해까지 나아가 왜구(倭寇) 활동, 해적질을 벌였다.
물산 부족해 조선에 적극적 구애
임진왜란 때는 왜군 선봉장 나서
쇼군 국서 위조, 조선과 국교 재개
미·중의 강한 압박, 우리의 길은…
일본 입조(入朝) 요구를 조선통신사로 풀어
자활 능력이 없던 대마도에 15세기 이래 조선과의 접촉과 무역은 생명줄이었다. 조선을 상국(上國)이자 대국(大國)으로 받들 수밖에 없었다. 조선 또한 대마도를 충순한 신하로 여겼다. 하지만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九州)를 정벌하여 전국(戰國) 일본을 통일하자 대마도에 위기가 닥친다. 같은 해 여름, 히데요시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 국왕을 교토(京都)로 입조(入朝)시키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상국’으로 받드는 조선 국왕을 데려오라는 황당한 명령에 요시토시는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1591년 2월, 히데요시는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이 귀국할 때 ‘명을 치는데 조선이 앞장서라(征明向導)’고 떠벌이는 국서를 들려 보낸다. 조선이 격분할 것을 우려한 요시토시와 겐소는 다시 조선으로 달려온다. 히데요시의 요구가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선을 통과하여 명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假道入明)’는 의미라고 강조한다. ‘정명향도’를 ‘가도입명’으로 바꿈으로써 양국 관계의 파탄을 막아보려는 안간힘이었다.
유키나가와 요시토시의 침략군은 승승장구했다. 5월 3일 서울에 가장 먼저 입성했고, 6월 1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다. 대마도에 은혜를 베풀었던 조선은 요시토시의 배신에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대마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시토시는 1599년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 1600년 유타니 야스케(柚谷彌介)를 잇따라 조선에 보냈다. 침략을 사죄하고 관계를 재개해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답이 없었고 사자들은 귀환하지 못했다.
요시토시는 포기하지 않고 왜란 때 붙잡혀 온 조선 피로인(被擄人) 160명을 송환했다. 성의 표시였다. 또 “새로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히데요시의 침략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여 도쿠가와 정권과 강화(講和)를 맺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계속 거부하면 재침(再侵)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력이 고갈된 데다 명군도 철수해 버린 상황에서 조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명 카드’를 다시 빼 들었다. “전쟁 이후 명의 허락 없이는 일본과 함부로 접촉할 수 없다”고 둘러댔다. 또 요동에 연락해 명군 장수를 부산까지 불러들였다. 명의 위세를 빌려 재침 위협에 맞서려는 호가호위(狐假虎威) 전술이었다. 1605년 부산에 내려온 명군 장수 유흥한(劉興漢)은 대마도 사자들 앞에서 일장 훈시를 한다. “너희들이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에 대비하여 명군 수만 명이 평안도에 대기 중이니 물러가라”는 내용이었다. 대마도 사자들은 유흥한의 호통에 ‘예예’하면서 복종하는 시늉을 했다.
조선 방방곡곡 다니며 방대한 정보 수집
대마도의 집요한 공작에 밀린 조선은 강화의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건다. 도쿠가와 정권이 먼저 강화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고 임진왜란 때 선정릉(宣靖陵)을 파헤친 범인(犯陵賊)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다. 중세시대에는 전쟁을 치른 뒤 먼저 국서를 보내는 것은 항복을 의미했다. 당연히 도쿠가와 정권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하지만 뻔뻔한 대마도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이에야스의 국서를 위조하고 대마도의 사형수 두 명을 범릉적으로 둔갑시켜 조선에 보낸다. 조건이 충족되자 1607년 조선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여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1609년 대마도와의 무역도 공식적으로 재개한다. 대마도가 다시 생명줄을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소씨는 척박하고 가난한 변방의 오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교활하면서도 전략적으로 행동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한 역사가는 일찍이 소씨를 가리켜 ‘여덟 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무렵 대마도가 보여준 외교술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노회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회답겸쇄환사, 그 안에 담긴 뜻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 재개는 고사하고 어떤 접촉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막부와 대마도가 집요하게 강화를 요구한 데다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떠오르고 있던 정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원수’ 일본과 강화할 수 없다는 명분과 국제정세 변화라는 현실 사이에서 조선이 고민 끝에 제시한 것이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내고 범릉적을 잡아 보내라는 조건이었다.
대마도의 기민하고 교활한 공작을 통해 두 조건이 충족되자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보낸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에 ‘회답’하고 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 백성을 데려온다(쇄환)’는 것을 강조한 명칭이다. 왜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명분과 현실을 동시에 고려하려 했던 조선 외교의 고뇌가 드러나는 명칭이기도 하다.
대마도의 기민하고 교활한 공작을 통해 두 조건이 충족되자 1607년 회답겸쇄환사를 보낸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에 ‘회답’하고 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 백성을 데려온다(쇄환)’는 것을 강조한 명칭이다. 왜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명분과 현실을 동시에 고려하려 했던 조선 외교의 고뇌가 드러나는 명칭이기도 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