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앵커리지의 캡틴 쿡 호텔에 마련된 미·중 고위급 회담장에서 양제츠(楊潔篪·71) 중공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이 대놓고 화를 내며 한 말이다.
직전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두 번째 발언을 마치고 취재진에 퇴장을 요청하자 양제츠 주임의 표정이 돌변했다.
“미국은 중국 면전에서 우월한 지위 운운할 자격이 없다. 20년 전, 30년 전 미국은 지위를 말하지 않았다. 중국이 그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아서다. 중국이 서양의 쓴맛을 아직도 덜 봤단 말인가. 외국에 봉쇄당한 시간이 짧았단 거냐. 중국의 목을 조를 수는 없다.”
지난 18~19일 알래스카에서 조 바이든의 미국과 시진핑의 중국이 정면 충돌했다. 입술을 창으로, 혀를 칼로 삼은 순창설검(脣槍舌劍)의 양보 없는 설전이 9시간 넘게 이어졌다. ‘늑대 전사(戰狼·전랑)’로 나선 양제츠 주임이 미국 때리기의 전면에 섰다. 37년 전 덩샤오핑은 양제츠를 향해 예의 바르다고 칭찬했다. 한때는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조지 HW 부시의 티벳 여행을 수행하며 마음을 얻었던 그였다. 그런 양제츠가 이제 앵커리지에선 미국 국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을 향해 공개 비난과 조롱으로 말싸움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변신은 미국과 한판 붙겠다는 애국주의와 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의 변신을 상징한다. 현실 세계에서 중국 지도부가, 온라인 공간에선 중국 네티즌이 ‘중국이 천하의 기준’이라는 과거 중화 왕조의 자긍심에 다시 취하고 있는 데 따른 변화다.
[후후월드]
덩샤오핑 시절 "예의 바르다" 칭찬받아
주미 대사 땐 부시 집안과 물밑 채널
알래스카 미ㆍ중 격전서 '전랑 외교'
시진핑 시대, 대미 힘대결로 변화 상징
양제츠 미국 비난 티셔츠 판매까지
“양제츠가 후시진으로 변했다”
양 주임은 미·중 외교의 산증인이다. 그러기에 양의 변신은 미·중 관계의 변화를 상징한다.
양 주임은 1950년 상하이 황푸(黃浦)구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기층 당 간부였다. 양은 수재였다. 마침 외교부장 천이(陳毅)가 베이징과 상하이에 특별히 용모 바른 미래 외교 인재를 육성하라고 지시했다. 상하이 외국어학원 부속 중학에 미래의 외교관이 속속 모여들었다. 천이 외교부장의 사위가 된 왕광야(王光亞·71) 전인대 화교위원회 주임이 양제츠와 기숙사 이층 침대를 같이 썼다. 연임설이 나오는 추이톈카이(崔天凱·69) 주미대사가 양제츠의 이곳 2년 후배다.
1972년 초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미·중 데탕트가 시작됐다. 양 주임은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공장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곧 ‘출국 인원 학습 집중 훈련반’에 뽑혔다. 왕광야, 천이의 친딸 천산산(陳珊珊·71, 이후 에스토니아 대사), 양제츠 주임의 부인 러아이주(樂愛珠, 이후 중국 외교부 빈곤퇴치업무 명예 대사), 저우원중(周文重·76, 이후 보아오포럼 비서장) 등이 모였다. 저우언라이가 선발하고 마오쩌둥이 최종 인가했다.
부시 집안과 비밀 연락 채널 양제츠
양제츠 대사의 첫 임무는 미·중 항공기 충돌 사건이었다. 2001년 4월 미국 EP-3E형 정찰기가 중국 전투기와 남중국해 해상에서 충돌했다. 미군기는 하이난다오의 중국군 공군기지에 긴급 착륙했다. 승무원은 전원 구류됐다. 양제츠는 미 국무부·국방부와 중공 고위층을 오갔다. 위기를 조용히 해결해냈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중 관계를 ‘전략적 경쟁 상대’로 정의했다. 양제츠는 이를 ‘이익상관자’로 낮춰 양국 간 마찰을 피하는 데 일조했다.
2007년 4월 양제츠는 최연소 중국 외교부장에 임명됐다. 2017년 19차 당 대회에서는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양제츠는 이젠 과거의 양제츠가 아니다.
“미국 측이 대만 문제에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견지한다고 거듭 표명했다.” 20일 중국 관영 신화사가 알린 앵커리지 회담의 전리품이다. 미국과 날 선 충돌을 불사한 양 주임이 블링컨 장관에게서 ‘하나의 중국’ 발언을 끌어냈다. 하지만 그의 변신이 계속 중국에 이득을 줄지는 미지수다. 설득과 압박이라는 양대 외교 레버리지에서 중국은 이제 전자 쪽으로 향하고 있다. ‘앵커리지 양제츠’의 모습은 가뜩이나 중국의 접근법에 마뜩잖은 바이든 행정부에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키게 됐다. 변신으로 얻어낸 중국 자긍심의 이면에 대가도 따라올 전망이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