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혀 절단’ 사건은 정당방위에 대한 법리를 논할 때 언제나 등장하는 사례다. 강제 키스하려던 낯선 남자 혀를 깨물었다 되레 중상해범으로 몰려 처벌받은 사건. 그 사건의 피해자인 최말자(75)씨가 56년 만인 지난해 재심을 신청했다.
민감 재판 뒤 소회 밝히는 법관들
힘있는 사람 재판에선 '기교사법'
잘못된 판결 바로잡기는 외면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할 수 있는 행위다. 그러나 재판부는 “최 씨측 주장은 당시 법원의 법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이지, 새로운 증거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법적으로 재심은 원재판에서 없었던 새 증거가 나왔을 때만 받아줄 수 있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 재판 진행을 범죄로 단죄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 판결문 말미에 “최 씨 청구를 받아줄 수는 없지만 그의 용기와 외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소회를 밝힌들, 궁색함만 더할 뿐이다.
지난주 대법원이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내린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은 군사독재 시절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례다. 집 없이 떠도는 사람을 '부랑인'이라고 낙인찍어 시설에 수용했다. 그 안에선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강제노역이 일상이었다.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여서 형제복지원에서만 12년간 513명이 숨졌다. 일부 수용자가 탈출해 실상을 알리자 경찰이 수사에 나서 박인근 원장을 구속했다. 그러나 검찰은 살인은 빼고 불법감금과 공금 횡령만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불법감금마저도 무죄라고 판단해버렸다.
대법원도 판결문 말미에 근엄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사건은)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인간 존엄성 침해며, 공적 담론을 거쳐 치유와 회복을 위한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피해자들을 외면했지만 사회는 이들을 보듬어줘야 한다니, 이율배반의 극치다.
부산지법이나 대법원이나 표현은 달라도 소회의 요지는 같다. 법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고뇌 어린 판단이니 억울해도 참아달라는 것이다. 뇌물 받은 유재수 전 금융위 국장 사건에서 "부친이 재배한 감자·옥수수를 (돈 준 사람들에게) 돌렸으니 밀착이 아닌 친분관계"라는 논리로 형을 깎아준 게 법원ㅇ이다. 은수미 성남시장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선 "검찰이 항소장을 잘못 썼다"고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기도 했다. 기교사법(技巧司法,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논리와 증거를 짜맞추는 재판을 뜻하는 법조계 은어)이란 비난도 감수했던 법원이 이제와 '법적 안정성'을 호소한다. 그런 노력과 정성의 10%만 기울여도 잘못된 과거 판단을 뒤집을 논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최현철 정책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