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언어장벽을 어떻게 넘었나
중국 한나라 무제는 북방의 강적 흉노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서방의 월지라는 세력과 연맹하기 위해 장건(張騫)이라는 인물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2000년 전 옛날에도 언어의 장벽은 엄연히 존재했다. 불멸의 역사서 『사기』를 쓴 사마천은 장건의 여행을 서술하면서 ‘중구역(重九譯)’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거듭해서 아홉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황제 명령, 여러 언어로 즉각 번역
문화교류·종교전래 길잡이 역할
당나라 때 이미 한문 성경 선보여
AI시대의 바벨탑은 어떻게 될까
몽골제국과 같이 다민족을 통치하는 세계제국의 경우 역관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몽골어밖에 모르는 황제는 당연히 자기네 말로 명령을 내렸는데, 이를 ‘성지(聖旨)’라고 불렀다. 이 명령은 그 자리에서 몽골어로 필사됐고, 동시에 바로 한문·페르시아어·위구르어 번역본이 제작됐다.
라틴어로 쓴 러시아·청나라 조약문서
몽골의 ‘멍에’를 벗어던진 러시아는 맹렬하게 시베리아에 진출했다. 마침내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아시아의 동쪽 끝 아무르 강가에 이르게 된다. 중국에 ‘아라사(俄羅斯)’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불렀다. 물론 ‘러시아’라는 말을 옮긴 것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몽골인들이 ‘루스(Rus)’라는 말의 어두음 ‘r’을 발음하기 힘들어, 모음을 하나 더 첨가하여 ‘우루스’ 혹은 ‘오로스’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한자로 옮겼기 때문이다.
종교의 전파 역시 번역, 특히 경전 번역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찍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선교를 시도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주민을 개종시키기 위해 자기들의 경전을 소그드어·위구르어·한문 등으로 번역했다. 지금도 그 조각들이 남아 있어 선교에서 경전 번역이 얼마나 핵심 요소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불교 역시 후한 말 이래 인도나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에 의해 초보적인 번역이 이뤄졌다. 4~5세기 중앙아시아 출신의 승려 쿠마라지바(鳩摩羅什·344~413)는 상당수의 불경을 한문으로 옮겨 불교의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당나라 때 현장(602?~664) 법사는 무려 17년간 인도에 머물면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공부했다. 귀국할 때 갖고 온 수많은 불경을 정확한 한문으로 번역, 그 후 불교도들이 읽는 많은 경전의 텍스트를 마련해줬다.
반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극도의 신성성이 강조되며 번역이 금지됐다. 무슬림에 의한 번역이 처음 나온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랍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됐는데, 이것이 오히려 이슬람권 내부의 광범위한 여행에 도움을 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육로와 해로를 누비고 다닌 모로코 출신의 중세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68)는 오로지 아랍어만으로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로마기독교 전파 보여주는 중국 비석
현재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비림(碑林)박물관에 가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큰 비석이 전시돼 있다. 로마(대진)의 기독교(경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어떻게 중국에 전파되어 유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전말을 자세히 적은 기념비적인 자료다. 이것이 기독교의 동방 전파에서 첫 번째 파도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은 세 번째 파도가 밀려왔다. 신·구약 성경이 한문으로 번역됐고, 그것이 조선에도 전해져 우리나라에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이 생겨났다. 기독교는 이처럼 세 차례 파도를 타고 동아시아로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통역과 번역을 통해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언어는 우리 사고(思考)가 머물고 자라는 집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묶어 놓는 쇠사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 족쇄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고, 그래서 성경 창세기에 나오듯이 이미 일찍부터 바벨의 탑을 쌓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신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해서 탑은 무너졌다. 역사상 인류 문명의 수많은 교류는 이러한 언어의 장벽을 넘으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이제 21세기 인류는 인공지능(AI)을 사용하여 새로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티칸 비밀서고에 보관 중인 몽골 황제의 친서
유럽은 공황 상황에 빠졌다. 이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1245년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요한 카르피니를 몽골의 궁정으로 파견했다. 그해 4월 프랑스 리옹을 출발한 카르피니는 러시아 키예프를 거쳐 이듬해 7월 몽골 카라코룸에 도착해 몽골 3대 황제 구육의 즉위식에 참가했다.
구육은 카르피니에게 교황에게 보내는 답신을 전했는데, 그 편지의 페르시아어 번역본(사진)이 현재 로마 바티칸 비밀 서고에 보관돼 있다.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