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직장인의 하루
[발신인 : A 팀장]
"야, 이거 영업직 교육자료인데 오늘 안에 강의 준비 다 끝내.
못 마치면 퇴근 없어.
그리고 업무 시간엔 하지 마.
개인적으로 알아서 준비해라."
이메일함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열어보니 500장 넘는 파워포인트(PPT) 파일이 담겼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다른 업무 지시가 또 떨어졌다. 이젠 익숙하다. 지난 두 달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집과 회사를 왕복했으니까. 몸도 마음도 지쳐 병원을 찾았다. 얼마 전부터 목에 잡히던 혹이 주먹만하게 부풀어올랐다. 의사는 "암일 수 있으니 당장 대학병원을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회사로 향했다. A 팀장이 비아냥거리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든 동료가 보는 앞에서 매일 쏟아지는 폭언. 처음엔 날 걱정하는 듯했던 동료들도 이젠 못 본 척 제 할 일만 한다.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 이대로 다니다간 몸과 마음의 병이 깊어질 것 같다.
"야, 이거 영업직 교육자료인데 오늘 안에 강의 준비 다 끝내.
못 마치면 퇴근 없어.
그리고 업무 시간엔 하지 마.
개인적으로 알아서 준비해라."
이메일함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열어보니 500장 넘는 파워포인트(PPT) 파일이 담겼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다른 업무 지시가 또 떨어졌다. 이젠 익숙하다. 지난 두 달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집과 회사를 왕복했으니까.
[밀실]
지옥 된 일터, 피해자들의 고백
"부모님이 어디 아파? 아니면 왜 그렇게 병원을 자주 가? 너 건강염려증 아냐?"
모든 동료가 보는 앞에서 매일 쏟아지는 폭언. 처음엔 날 걱정하는 듯했던 동료들도 이젠 못 본 척 제 할 일만 한다.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 이대로 다니다간 몸과 마음의 병이 깊어질 것 같다.
문제는 부서 직속 상사였던 A 팀장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다른 직원들 앞에서 서류를 집어 던졌죠. "너 때문에 망했다"며 고함을 지르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윤지비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사회불안장애를 진단받고 결국 사표까지 냈습니다.
10명 중 4명, 직장 내 괴롭힘은 '진행형'
유명 운동선수나 연예인에게 과거 학교 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하는 '학폭 미투'가 연일 이어집니다. 국민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데요. 직장 내 괴롭힘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매일 반강제로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학폭과 비슷하죠. 어감의 차이만 있을 뿐 '폭력'과 '괴롭힘'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요. 학폭만큼 '직폭'도 매우 심각한 문제인 거죠.
윤지비의 팀장도 직급과 서열을 활용했습니다. 그를 쏙 빼고 회의를 진행하는가 하면, 업무 관련 메일도 일부러 전달하지 않았죠.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 휴가 전날엔 과도한 업무를 던져준 뒤 "밤새워서라도 끝내고 가라"며 엄포를 놓았다고 합니다. 교묘한 방식으로 괴롭히며 결국 손을 들게 만든 거죠.
"밥줄 걸려 있으니 버틸 수밖에…"
지난해 수도권의 한 주민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던 작가 지망생 지지(활동명·27)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한 공무원 '사수'의 괴롭힘에 시달렸습니다. 업무 중 짜증 섞인 말투로 일관하는 사수에게 문제 제기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폭언뿐이었죠.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일도 XX 못하는 게 XX 꼴 보기 싫다"….
참고 또 참았지만 그럴수록 우울증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결국 일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는 퇴사 후 산업재해 처리를 기대하며 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처리 결과는 가해자 '훈계' 조치였다고 해요. 지금은 대출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직장갑질 금지법? 단 3%만 '신고해봤다'
하지만 대부분 강제성이 없는 권고 수준의 조항에 그칩니다.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신고 자체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해 직장갑질119 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본 적 있다'고 답한 사람은 3%에 불과했죠.
피해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 관련법이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가해자의 행동을 바로잡고, 신고자를 보호하는 데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겁니다.
윤지비는 "때로는 괴롭힘을 지켜보는 방관자들이 문제를 더 키운다. 누구든 가해자를 신고했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지는 "직장 내 폭력 예방 교육은 보여주기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가해자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는 상담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생활 '스트레스' 아닌 폭력 '피해'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공황이나 발작,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우선 자기가 겪은 일이 폭력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밀실팀이 만난 '직폭' 피해자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렵게 입을 연 학폭 피해자들은 십수년이 지나도 그때의 지옥 같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토로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도 평생 머릿속에 각인될 악몽이죠. 그럴수록 아픈 상처를 마주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은 내가 피해자라는 걸 깨닫기도 어려워요. 용기 내서 말해도 '맞은 것도 아닌데 어른이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사회생활이 다 그래'라는 반응만 돌아오거든요.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내가 아프다'는 사실은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작가 지망생 지지)
영상=석예슬 인턴, 백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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