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합병” vs “인정 못 해”
이날 재판에서 검찰은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1시간 넘게 공소 사실의 요지를 설명했다. 검찰은 “이 부회장과 미래전략실 관련자들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벌인 불법 합병, 회계부정 사건”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면서 이 부회장이 많은 지분을 보유한 제일모직 가치를 부풀리고, 삼성물산의 가치는 의도적으로 낮췄다고 판단했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단은 “모두 정상적인 합병 과정이었다”고 반박했다. 변호인단은 “합병은 사업상 필요했으며 규제환경 변화 대응과 지배구조 개선, 경영권 안정화 측면에서 결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삼성물산의 주가는 당시 지속적 내림세, 제일모직은 지속적 오름세였다며 “합병이 다른 시점에 이뤄졌다면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에 더 불리해졌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오너 부재’로 굵직한 결정 지체 우려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 이후 급변하는 국내외 경영 상황에 삼성이 ‘총수 부재’로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특히 갈수록 치열해지는 대만 TSMC와의 파운드리(위탁생산) 경쟁 등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에 대한 의사결정이 느려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올해 반도체 초호황(슈퍼사이클)을 예고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인 D램 시장 규모가 지난해 663억 달러(약 74조원)에서 내년 1044억 달러(약 118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가트너·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 등은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이 지난해보다 8.7% 증가한 4775억 달러(약 54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TSMC, 미국·일본과 ‘반도체 동맹’
삼성전자는 2030년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 달성을 제시하고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면서 대대적으로 파운드리 부문 강화에 나섰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파운드리 점유율은 TSMC 54%, 삼성전자 17%였다. 하지만 올해 1분기 추정 점유율은 TSMC가 56%, 삼성전자 18%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TSMC의 경우 생산 능력이 월 110만 장이고, 삼성전자는 43만 장 수준”이라며 “세계 1위 달성이 목표라면 설비 투자를 최소한 2.5배 이상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타이밍 놓쳐 도태된 일본처럼 될 수 있어”
TSMC의 공격적 행보와 달리, 삼성전자는 170억 달러(약 19조원) 규모의 미국 반도체공장 투자를 놓고 장고 중이다. 기존 텍사스 오스틴이 유력하지만 애리조나주 피닉스, 뉴욕주 제네시카운티 등 후보지 가운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대규모 M&A는 더 어렵다. 삼성전자는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성이 121조원에 이른다. 최근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이 장기화하자,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관련 반도체 기업 인수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이 부회장의 옥중 경영 시기에 대규모 M&A를 진행했던 사례가 없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반도체 산업은 국가 간 치열한 경쟁과 끈끈한 협력이 동시에 이뤄져야 발전할 수 있는데, 총수 부재 상황인 삼성전자는 일종의 ‘왕따’가 되는 모양새여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안 전무는 이어 “1990~2000년대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이 투자 결정 속도가 늦어지면서, 당시 공격적이고 과감하게 투자를 감행한 삼성전자에 밀려나 결국 반도체 시장에서 도태된 바 있다”며 “삼성이 의사결정 타이밍을 반복적으로 놓치다 보면 이런 일본의 선례를 따라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