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 년을 격한 지금 한국 사회는 반대로 공익을 사익으로 연결하는 능력들이 경이롭다. 선거를 앞두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뿌리는 행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선거 중립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가덕도 앞바다에서 “가슴이 뛴다”고 한 것도 그 예가 되리라. 카이사르와 차이는 있다. 공·사익을 연결하는 방향도 반대지만, 솜씨도 한 수 아래다. 너무 속 들여다보이는 짓이어서 ‘교묘하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정치 무능·위선 속 각자도생 판쳐
공익과 사익 경계는 갈수록 흐릿
오염된 공정 언어가 먹힐 수 있나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 LH의 책임자였던 변창흠 국토부 장관에게 “문제를 대단히 감수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국토부가 가덕도 공항에 반대하는 것처럼 비쳐 죄송하다”고 했던 것처럼 “LH에 비리가 있는 것처럼 비쳐 죄송하다”고 넘어가라는 건가. “(스크린도어 사고를 당한) 걔만 신경을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발언의 주인공에게 어떤 감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번 사태를 보며 유독 걸리는 대목이 있다. 익명성에 기댄 일부 LH 직원들의 반응이다. “이게 우리 회사만의 혜택이자 복지인데, 꼬우면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 복종과 일상에서 악이 평범해지듯, 선민의식과 관행 속에서 윤리 감각이 마비됐다. 고구마 줄기보다 더 얽혀 튀어나오는 투기 의혹이 그 증거다. “여당 정치인들이 우리 쪽에 정보를 요구해 투기한 것도 봤다. 왜 우리만 갖고 X랄하나”는 반응도 있었다. 현 정부 부동산 정책 설계자는 분명 “부동산은 끝났다”고 했는데, 이 무슨 아수라장인가.
청계재단, K재단·미르재단. 공익을 빙자한 사익이라고 비난받았던 전임 정부의 유적들이다. 문재인 정권은 이런 유산을 극복하겠다는 호기로 출발했다. 기대가 배신감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온갖 기득권으로 ‘가족 사랑’을 실천한 장관 일가, 아들의 군 휴가 특혜 시비에 휘말린 후임 장관,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할머니를 이용한 시민운동가, 개발 정보를 이용한 관광지 투자를 문화유산 보호라고 우긴 여당 의원. 대통령이 그런 측근에 대해 ‘마음의 빚’이 있다고 고백한 순간, 공정이란 말은 오염돼 빛을 잃었다.
다락처럼 오른 집값, 말라버린 일자리에 질린 사람들은 국가가 내 삶을 책임질 수 없다는 걸 이미 깨달았다. 정부가 능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는데, 반복되는 헛발질을 보노라니 이젠 의지마저 의심스럽다. 절박해진 사람들은 4자 진언(眞言)을 외운다. 각·자·도·생. 이 길에선 공익-사익의 경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커진 정부에서 기회도 커졌다. 기회는 찬스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