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의 초입에 100세에 가까운 벽돌 양옥집 두 채가 있다. 먼저 마주쳤던 건 단층집인 홍난파 가옥이다. 1930년생인 이 집은 일찌감치 리모델링돼 기념관과 작은 공연장으로 애용된다. 거기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한창때 한가락 했을 것 같은 이층집이 있었다. 뼈대는 여전히 볼 만했지만 꾀죄죄하고 지저분한 외관은 폐가를 방불케 했다. 널브러진 빨래와 음산한 인기척이 더해진 탓에 서둘러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게 한국 근대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딜쿠샤’(Dilkusha)였다는 걸 안 건 뒷 날의 일이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그 집에도 찬란한 시작이 있었다. 집을 지은 이는 1919년 3월 3·1운동을 세계에 타전했던 AP통신 기자 앨버트 테일러(1875~1948)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테일러는 1923년 이 집을 세운 뒤 1942년 일제에 의해 국외 추방당할 때까지 거주했다.
1963년 국가가 소유자가 됐지만, 문화재 관리 개념을 기대하긴 어렵던 시절이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이 무단 입주해 살면서 건물은 훼손됐다. 2016년 서울시가 딜쿠샤를 복원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집에는 무려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국은 설득과 소송을 병행하면서 몇 년에 걸쳐 이들을 순차적으로 내보냈다.
102번째 3·1절이었던 지난 1일 딜쿠샤는 세월의 때를 말끔히 벗겨내고 옛 모습을 되찾았다. 테일러 부부의 유품 1000여점을 기증해 재개관의 일등공신이 된 손녀 제니퍼 테일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쓴 미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
봄빛이 완연하다. 식사 후 딜쿠샤까지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기미년 3월의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 한편에 담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