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는 저한테 '랩' 같았어요. 제가 전공한 ‘정가(正歌)’는 5분 내외의 한 곡이 글자 수는 45자가 안 넘거든요.”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가면서 음미하는 노래”라고 정가를 소개한 장씨는 여전히 국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취재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가 부른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가 중앙일보 사옥 인터뷰룸에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런 그는 왜 ‘랩’ 같은 트로트에 도전했을까.
"전통 국악 '정가' 알리려 도전"
그런 정가를 전공한 장씨는 트로트 도전에 고민이 많았다. "우리 고유의 것, 국악을 즐겨야 한다는 신념도 강했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국악계에서 노력해왔던 게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으로만 평가될까 봐 걱정도 많이 됐다"고 했다.
그가 도전장을 내민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가라는 장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노래 하나는 잘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막상 세상에 나오니 사람들이 그 노래(정가)를 잘 모른다는 걸 알았어요. 설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게 너무 가슴 아팠어요. 적어도 제 후배들, 제자들은 정가 전공이라고 했을 때 '아 그거 알아!'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었습니다."
예상을 빗나간 준결승 진출
장씨는 마지막 준결승 무대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위한 헌정곡을 선택했다. 승부에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장씨는 "서울대 입학까지 성공했지만, 막상 와보니 서울대라는 예쁜 포장지 안에 나는 뽁뽁이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던 시기가 있었다"면서 "그때 그 친구가 대중으로서 제 목소리를 인정해주고 응원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평생을 두고 봤을 때 20대에 내가 정말 좋아했고 고마웠던 친구를 위해 부른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고 했다.
설 자리 없었던 ‘국악 엘리트’
"함열초라는 전북 익산시에 있는 아주 시골 초등학교를 나왔는데, 5학년 때 열린 음악 방과 후 수업에서 우연히 시조를 접했어요. 그때 음악에 대한 열망이 생겼고 당시 부모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 시조를 서로 알려주고 지어서 부르고 하는 모임인 익산시 시우회를 찾아갔죠.”
시우회에서 만난 선생님들이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무료로 그를 가르쳐 줬다고 한다. 그때 장씨는 서울로 가고 싶다는 꿈을 갖고 뒤늦게 국악고 입시에 뛰어들었다. 그는 "토요일마다 무궁화호를 타고 왕복 8시간 걸려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왔다 갔다 했다"며 "늦게 시작한 터라 할 게 많아 매일 녹초였는데 6개월간의 그 생활이 굉장히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호텔리어에서 다시 국악인으로
그때 장씨는 지인의 소개로 계약직 호텔리어가 됐다. 그래도 국악을 놓지는 않았다. 장씨는 "당시 국악방송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뒀고 그때부터 국악계에서 많이 찾아주기 시작했다”고 했다.
힘들었던 시간 덕분에 앞으로의 목표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장씨는 “좋은 선생님들 만난 덕분에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국악을 배울 수 있었다. 자리를 잡으면 나처럼 어린 시절에 힘들게 음악을 배우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노래할 수 있는 그 날까지 노력해 후배들에게 '정가 전공이라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심어주고 싶다”고도 했다.
정희윤 기자 chung.hee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