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5일 일요일. 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검문소 7개를 통과하여 광주로 들어갔다. 광주 외곽은 M16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포위하고 있었고, 매우 살벌하고 위험한 분위기였다. 곳곳에 불에 탄 차량과 드문드문 불이 난 건물이 보였다.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뭉쳐라. 전남. 우리밖에 없다.’는 문구가 크게 적힌 버스가 길옆에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차량은 다니지 않았지만 광주는 질서가 있었다. 도청은 폭도들이 시위하는 곳이라고 표현한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만 거대한 장례식장을 연상케 했다.
DJ에게 사형선고한 전두환
DJ는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
진정한 용서의 실천, 지금은…
아버지와 나는 광주의 억울함을 미국대사관에 알렸다. 그러나 2주만에 나를 소환한 대사관에서는 “5공화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당신 조상들이 한국에 많은 기여를 했으니 체포하지는 않겠지만 광주에서 데모 주동을 했으니 한국을 떠나라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젊고 혈기왕성한 나는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너는 사실과 상관없이 죄인이고 요주의 인물이다. 네가 한국을 떠나지 않고 광주항쟁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결국 체포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순천에서 봉사하고 매일 경찰에 일과를 보고하며 지내면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다”고 하셨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국을 떠날 수는 없었다.
나는 곧 순천으로 내려가 작은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순천경찰서 정보과에 매일의 일과를 보고하며 지냈다. 그리고 그해 여름, 학교에 다시 복귀했지만 도저히 버틸 길이 없어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문무대에 지원했다. 9박10일의 고된 훈련이었지만, 내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데모 주동자라는 누명을 벗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후, 미국에서 87년에 수련생활을 시작하고 91년에 한국에 다시 돌아와 세브란스 국제진료소의 책임자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전라남도에서 신적으로 여기던 김대중(DJ) 선생을 꼭 만나고 싶었다. 유진벨 재단에서 북한을 돕는 형님에게 간곡히 부탁해 94년 봄, 드디어 김대중 선생님과 독대했다. 여러 대화 중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전두환은 아직 살아있지 않습니까. 왜 보복하지 않고 내버려둡니까?” 김대중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인 원장. 보복해서 뭣 할 것이여. 보복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여.” 라고 하셨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나의 마음을 녹였다. 그러면서 30년의 옥살이 후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보복도 하지 않고 오로지 흑인과 백인의 화합을 위해 일했다는 이야기는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시간이 흘러 김대중 선생님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나는 98년 1월 취임식에 VIP 초대장을 받았다.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단상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귀빈으로 앉아 있었다. 순간 분노가 차올랐지만 점차 선생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국 민족은 희망이 있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자리는 김대중 선생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을 용서하는 자리였다. 말로만 하는 용서가 아니라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두 사람을 초대하여 진정한 용서를 실천한 자리였다. 그분은 참으로 노벨상감이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방법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지만 나는 어떤 업적보다도 김대중 대통령은 한 인간으로서 용서와 화합을 실천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포용의 정신과 존경받는 행동을 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자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