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만약 20세기 런던이 아닌 지금 서울에 산다면 수고를 꽤 덜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줄줄이 장관으로 가는 ‘부엉이 모임’이나 혹은 ‘달빛 기사단’을 벗기면 금세 어떤 숫자가 나올 테니 그렇다. ‘내 편만 내 곁에’ 쓰는 일정한 패턴이어서 헤아리는 게 복잡할 까닭도 없다. 29번째 야당 패싱 장관과 그 와중에 튕겨 나온 청와대 민정수석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직위가 높든 낮든 던바의 수에 못 끼이면 그냥 겉도는 모양이다.
블랙리스트 맹공하던 문 정부
김은경 유죄에도 ‘우린 달라’
노 정부도 무오류 집착 안 했다
얼마 전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유죄 판결을 받자 청와대는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고 우겼다. 1년 전에 ‘문재인 정부에 사찰 DNA가 없다’더니 이젠 ‘판결문에 블랙리스트 단어가 없다’고 눈 가리고 아웅이다. 전 정권은 블랙리스트 대상자에게 정부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 정권은 블랙리스트 대상자의 일자리를 빼앗았다. 그래도 다르다는 건데 사실 왜곡이다. 법원은 ‘표적 감사로 사표를 받았다’고 판시했다. 잡아떼고 말을 뒤집으며 버티는 대법원장이 있고, 그런 거짓말쟁이 대법원장을 ‘묻지마 싸고도는’ 거대 여당도 있다.
다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몰라서 딴청을 부리고, 심지어 화를 내는 건 아닐 것이다. 남다른 기억력과 판단력, 언변으로 나라를 경영하는 높은 벼슬에 오른 분들이다. 그래도 억지와 궤변을 매일 쏟아내야 하는 건 ‘던바의 공감 집단 분위기’에 맞추다 보니 그러는 걸 텐데, 공감 집단은 왜 오류를 수정하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물론 앞선 정권을 모조리 적폐 정권으로 몰고 도덕적 무결점을 내걸었기에 자신들의 행동은 무조건 옳다는 무오류 코스프레가 필요하긴 할 것 같다.
숭명대의(崇明大義)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 정권이 청나라에 매번 끌려다니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외쳤던 자기 부정과 다를 바 없다. 그게 바로 유체이탈이고 불통이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청와대는 심지어 이마저도 부인한다. 자신들을 소통 정부란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 정부 때 “블랙리스트는 국가 폭력”이라고 했다. 그럼 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블랙리스트 사건이 아니다’고 떼를 쓸 게 아니다. 탈원전 반대 시민단체 보고서를 ‘동향보고 수준’이라고 둘러댈 것만도 아니다.
무오류의 오류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차제에 월성 원전, 울산시장 선거 개입 등 다른 권력형 사건에 집중된 의혹도 탈탈 털어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진보 정치의 출발점이다. 그게 ‘진보 정당에 가장 부족한 건 진보’라던 노회찬이 말한 ‘진보의 세속화’다. 세상을 진보시키려면 자신이 먼저 진보해야 한다. 언행일치다. 안 그러면 ‘우린 거짓말을 안 한다’는 말을 과연 누가 믿겠나.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