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의 허브된 숙박시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원거리 여행은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호기심과 여가를 위한 개인 여행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상인이나 사신 혹은 종교인 등이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갖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경우에도 상당한 시간과 경비는 물론 이루 말하기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주요 길목에 세운 숙박·휴식 장소
지중해~중국 잇는 핵심기지 역할
13~14세기 몽골제국 팽창 떠받쳐
21세기 인력·문물 교류의 원조격
하지만 과거 실크로드를 실제로 오갔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는지를 웅변한다. 1세기 후반, 중국 후한 시대에 나온 『한서(漢書)』를 보자. 중앙아시아 파미르 산맥을 넘어가는 험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대두통(大頭痛)과 소두통(小頭痛)의 산, 적토(赤土)와 신열(身熱)의 비탈길을 지나면, 사람들은 몸에서 열이 나고 창백해지며,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는데 나귀와 가축도 모두 마찬가지다. 길이 좁은 곳은 1척 6~7촌(50㎝)이고 길이는 30리(1.2㎞)나 뻗어 있다. 험악하고 측량할 수 없는 심연에 닿아 있어, 행인들은 말을 탄 사람이건 걷는 사람이건 서로 붙잡고 끈으로 서로 끌면서, 2000여리(800㎞)를 지나서야 비로소 인도에 도착한다.”
목숨 걸고 여행한 사신·승려·상인들
실크로드가 이토록 지난한 길이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동서 문명 가교의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까. 왕명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선 사신들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구하러 떠난 승려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돈벌이를 위해 길을 나서는 상인들은 왜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원거리 무역을 감행했을까. 물론 그들이라고 지리적 거리와 자연적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교역을 위한 기본 조건은 갖춰져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지중해에서부터 당나라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 연변에 위치한 크고 작은 도시에는 수많은 대상숙이 세워졌다. 지방 유력자나 부호가 운영하는 곳도 있었지만 때로는 나라의 군주가 많은 자본을 투여해 지은 크고 화려한 곳도 있었다. 터키나 이란에서는 현재까지도 그 유적을 볼 수 있다.
그중 일부는 대규모 거류지로 발전해 교역의 핵심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3~9세기 유라시아 내륙 교역을 장악했던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각지에 이러한 거류지를 형성했다. 당 제국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 상인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그들 가운데 대표 격인 인물에게 ‘살보’(薩寶)라는 정5품 관직을 줘서 감독하도록 했다. ‘살보’는 ‘대상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소그드 상인 다수는 사마르칸트나 타슈켄트 같은 대도시에 있는 고용주가 파견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외지에서 장사해서 수입을 올리면 그것을 본국으로 송환하고 이윤의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 4세기경 소그드 상인 한 사람이 본국으로 보낸 편지가 발견됐는데, 순품 사향 800g을 사서 보내니 그것을 팔아서 남는 이익의 일부는 고향에 두고 온 자기 자식의 교육비로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향의 가치는 당시 은 27㎏, 현재 시세로 치자면 4000만원 정도 된다.
동양문화에 대한 서구의 이해 높여
몽골 제국의 역참망은 실크로드 교통에 혁신을 가져왔다.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은 물론 예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여태껏 동아시아를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던 유럽 선교사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선교사들은 유라시아 동쪽 끝에서 만난 사람들의 풍습과 문화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유럽은 비로소 세계를 향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마르코 폴로 같은 이탈리아 상인들도 찾아왔다.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에는 역참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나온다. 즉 25마일에 하나씩 들어선 “크고 멋있는 숙사”에는 300~400마리의 말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으며, “사치스러운 비단으로 장식된 화려한 침대와 물건”이 준비돼 있었다.
실크로드를 통한 교통과 무역은 대상숙과 거류지를 근거로 원활하게 이뤄졌다. 나아가 몽골과 같은 초원의 유목민들이 유라시아 규모의 역참 네트워크를 건설함으로써 그 속도와 규모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역사상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간의 교류는 바로 사막의 오아시스 주민과 초원 유목민들이 세우고 운영한 카라반사라이와 역참을 허브로 해서 작동될 수 있었던 것이다.
4세기 소그드 상인 “중국 황제가 도망쳤다”
반닥은 이 편지에서 중국 낙양에 훈족(Hun)이 침입해 커다란 기근과 화재가 발생하고, 결국 황제가 도망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무역 거래는 물론 당시 중국의 정세도 상세히 알리기도 했다. 이는 311년 흉노족의 공격으로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제는 남쪽으로 도망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킨다.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