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 모두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2019년 1월 신년사에서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라고 공언했다. 북한에서 신년사는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 무오류의 최고존엄이 공표한 이상 이를 교본으로 삼아 북한의 각급 조직과 기구별로 정책이 수립되고 집단 학습이 이뤄진다.
‘의지=현실’ 간주는 곤란
‘비핵화 의지≠비핵화’ 상식
조건 안 맞아 결렬 땐 흑화
핵무력 의지로 바뀌며 악화
이를 토대로 보면 북한 비핵화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 견적이 나온다. 핵을 가진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믿고 한국과 미국이 먼저 안보적·외교적 무장해제를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북한의 이른바 ‘비핵화 의지’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항상 ‘핵무력 의지’로 흑화했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모두 그러했다. 우리는 김 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에서 “비핵화 의지” 육성을 들었지만, “새로운 길”이라는 ‘핵 증강 플랜B’도 동시에 들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 모습을 강요하려 들고 공화국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중략)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였다. 북한은 이미 새로운 길을 걷는 단계에 와 있다.
2000년대 중반 대북지원 민간단체와 함께 평양 땅을 밟은 적이 있다. 그곳에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은 없었다. 방북 마지막 날 순안공항에서 짧은 체류 기간 중 얼굴을 익혔던 북측 실무자와 악수를 할 때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애잔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정서가 냉엄한 남북의 현실을 가리지는 못한다. 그 며칠 전 이 실무자는 느닷없이 취재진의 카메라를 일제히 수거한 뒤 메모리 카드를 빼내 사진을 삭제했다. 통제되지 않은 사진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눈빛으로 일순 통했다 한들 남한 인사들을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엄중한 그의 현실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비핵화 의지와 비핵화 역시 동일하다. 비핵화 의지를 부각하기에 앞서 북한의 속내엔 결코 물러서지 않을 조건이 있음을 잊지 않는 게 북한이 어떤 카드를 들고나올지를 예측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냉정해지지 않으면 망한다.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