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어린 시절 자주 들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이다. 백 소장은 생전에 “그 말이 내 일생을 길라잡는 새김말(좌우명)이 돼버렸어”라며 어머니의 말씀을 자주 언급했다.
백 소장이 떠나는 길은 어머니의 새김말을 따른 듯했다. 빈소에 조화가 하나도 없었다. 고인은 생전에 "나에게 보낼 조화가 있으면 소외된 사람들, 투쟁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 달라"는 유지를 남겼다고 한다. 이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연락을 취해 문재인 대통령의 조화를 전달하려 했지만, 장례위원회 측은 사양했다.
“병상에 넣지 말라”던 고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장례의 명칭은 고인이 쓴 마지막 글귀 '노나메기'로 정해졌다. 고인이 임종 직전 쓴 마지막 글귀인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모두가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백 소장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펴낸 책 『버선발 이야기』(2019)에 ‘노나메기 사상’을 담았다.
공식 조문이 시작된 이날 오후 2시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정계 인사로는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다. 박 전 장관은 "대학로에 있는 통일연구소에 거처하실 때 기자로서 찾아 뵙기도 했고 국회의원 시절에는 응원 메시지도 주셨다"며 "재벌개혁, 검찰개혁 힘내라고, 저에게 시원하고 단호해서 좋다고, 정치는 그렇게 하는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더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빨리 가셨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류호정, 배복주, 장혜영 등 정의당 의원들도 이날 조문했다. 강은미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불평등이 심화되고 민생이 어려울 때 진보진영의 큰 별이 진 게 안타깝다"면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사람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사셨던 큰 뜻을 이어받아 정의당이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나은 자세로 필요한 역할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은 "백기완 선생님은 항상 길 위에서 뵀다. 촛불집회 뿐아니라 광우병, 사대강 때도, 거리위 뿐 아니라 여러 현장에서 백 선생님이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앉아계시면 그렇게 든든했다"고 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도 "분단된 조국을 두고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한스러우셨을까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뜻을 잊지 않고 잇겠다는 다짐을 한다.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하셨다. 이제 앞서서 가셨으니 산자로서 고인의 뜻을 잊지 않고 큰 뜻이 역사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이 방문하자 일반 조문객이 "변절자"라고 외치다가 장례위원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이 상임고문은 "(고인과) 처음만난 건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할 때"라고 회상하며 "백 선생님이 돌아가시면서 민주화 운동 1세대는 다 돌아가셨다. 우리가 그 다음 민주화운동 세대인데, 아직 만족할만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아서 앞으로 후배들이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백 선생의 뜻을 잇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5일장인 백 소장 장례식은 일반인의 조문을 받는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 외에 전국 16개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지역 시민분향소가 설치된다. 아울러 추모관 홈페이지도 개설(baekgiwan.net)해 고인의 동영상, 사진을 비롯해 백 소장이 지향했던 삶을 담았다. 발인은 19일 오전 8시 진행된다. 같은날 오전 9시부터 대학로에서 노제·추모 행진 후 11시 시청 광장 앞에서 영결식을 갖는다.
권혜림 기자 kwon.hyer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