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우리 현대사와 민주화의 큰 고비와 이정표마다 늘 고인이 있었다”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그의 숭고한 뜻은 정의당과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정의로운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끈질기게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이날 페이스북에 “선생께서 작사하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처럼 앞서서 나가시는 님을 산 자로서 충실히 따르겠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선생께서 평생 맞섰던 철옹성 같은 기득권의 벽, 두려움 없이 마주하겠다”고 밝혔다.
양김(兩金) 단일화 외치며 사퇴한 민중 후보
1987년 대선에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기호 8번 후보였던 고인은 1987년 12월 3일 “민주연립정부안(案)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며 양김(兩金) 후보에 단일화를 공식 제안했다. 사흘 뒤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집회에선 “정말 어물어물하다가는 노태우 씨에게 또 빼앗기게 되니, 두 김씨는 제발 내 말을 좀 들어달라”고도 호소했다. 당시 10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두루마기 차림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포효하는 고인의 모습은 세간의 화제였다.
고인은 3당 합당 이후 열린 1992년 대선에선 끝까지 완주했다. 결과는 23만표, 1.0% 득표였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시 고인이 내세웠던 ‘민중 후보론’은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30만표·1.2% 득표)의 완주와 민주노동당 창당을 거쳐 현재 정의당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날 정의당에서 “(고인은) 대통령선거에 독자 민중 후보로 출마하심으로써 진보정치의 지평을 열기도 하셨다”(황순식 비상대책위원)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민주화운동 현장에…재야 출신 정치인과 깊은 인연
고인은 1985년 3월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서울 민통련 의장을 지냈다. 당시 민통련에 참여했던 정치권 인사로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 등이 있다. 당시 민주화청년연합(민청련)을 이끌었던 고(故)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도 민통련 창립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고인은 2011년 12월 김 전 장관의 장례식 당시 빈소를 찾아 “이 늙은이가 죽어야 하는데 근태가 먼저 죽어 내가 부끄럽다”며 흐느끼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고인은 한·미 FTA 반대 운동, 용산 참사 규탄 집회 등 시위 현장에 꾸준히 참석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한 2016~2017년 촛불 집회엔 23차례 가운데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7년 7월엔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노점상은 죽어가고 있다. 다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