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2〉
루스는 19세기 말 산둥(山東)성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3살 때 의화단사건이 발발했다. 선교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루스 일가는 중국인 보모의 도움을 받았다. 목선으로 인천 거쳐 한성에 도착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난이 평정되자 중국으로 돌아왔다. 루스는 1912년 가을, 14세 때 중국을 떠났다. 예일대학을 마치고 26세 때 시사주간지 타임을 창간했다. 유년기에 겪은 의화단사건과 귀국 1년 전에 발발한 신해혁명은 평생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타임은 격동기 중국에 대한 편파성 보도와 지나친 개입으로 특정 인물이나 정당의 기관지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오합지졸 중국의 기독교 전사들
당당한 군인으로 변모시킨 인물”
‘타임’ 1928년 7월 2일자 표지 장식
펑, 미국인 목사 부부 선행에 감동
부하들에게 기독교 믿으라고 명령
직접 세례, 군가를 찬송가로 바꿔
국민당의 계파분쟁은 심각할 정도였다. 장제스는 하야를 선언하고 일본으로 갔다. 펑은 제3집단군사령관 옌시산(閻錫山·염석산)과 연합했다. 장제스의 지지를 선언하고 귀국을 건의했다. 귀국 후 총사령관에 복직한 장은 펑과 정식으로 결맹의식을 열었다. 결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제스가 쑨원의 삼민주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펑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서 패하자 옌시산과 연합했다. 장제스 타도를 선언했다. 전쟁시작 전 옌은 펑을 연금시켰다. 장제스에게 대가를 요구했다.
펑, 장의 무저항정책에 격분해 등돌려
1931년 9월 일본군이 동북을 점령했다. 장제스는 동북을 포기하고 홍군 토벌에 주력했다. 태산에 칩거하던 펑위샹은 장의 무저항정책에 격분했다. 펑은 항일을 작정했다. 옛 근거지 장자커우(張家口)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중항일동맹군을 조직했다. 순식간에 10만명을 모았다. 동맹군은 여론의 지지와 갈채를 받았다.
장제스는 펑위샹의 독자적인 항일에 발끈했다. 동맹군 진압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펑은 장과 일본군의 이중위협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동맹군을 해체하고 다시 태산에 은거했다. 1935년 9월, 장이 보낸 전문을 받았다. “난징에서 만나자.” 펑은 장제스가 항일전쟁을 작정했다고 판단했다. 태산을 떠났다. 장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지난 일은 날려버리자.” 1급상장 계급장을 받은 펑은 국민정부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했다.
이듬해 겨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를 구금했다. 펑은 장쉐량에게 전문을 보냈다. “내가 갈 테니 나를 감금하고 위원장은 풀어줘라.” 행정원장 허잉친(何應欽·하응흠)이 시안 폭격을 결정하자 “장제스가 죽게 생겼다. 항일전쟁을 이끌 사람은 장제스 외에는 없다”며 통곡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