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문 정부의 엉터리 연금술

중앙일보

입력 2021.01.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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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때아닌 주인 논쟁이 요란하다. 거창하게 ‘국가의 주인이 누구냐’는 건데, 요란한 수레만큼이나 속이 비어 허무하다. 물건을 채우지도 못한 수레가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기울어 오히려 서글프다.
 
이번 소란은 탈원전 정책에 대한 감사원의 공익 감사 착수에서 시작됐다. 감사원이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탈원전 정책 수립 과정에 절차적 위법성이 있는지 감사를 시작하자 여권이 최재형 감사원장을 향해 집중포화를 시작한 것이다.

선출된 권력을 침범불가의 성역으로 여기는 여권
국민투표로만 주권 제한한 유신헌법 따라하기?
권력 행사 클수록 사후 제재도 커야 하는 게 당연
쇳덩이 금 만들어주겠다는 약속 믿은 국민만 불행

그런데 그 말들이 참으로 놀랍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집을 잘 지키라 했더니 아예 안방을 차지하려 듭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라 했더니 주인 행세를 합니다.”
 
감사원은 ‘국가의 세입·세출의 결산, 국가 및 법률이 정한 단체의 회계검사와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감찰 (헌법 제97조)’을 목적으로 한 헌법기관이다. 행정기관과 공무원의 직무를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원이 헌법적 소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 전 실장의 의식에는 이런 감사원을 그저 집을 지키는 개 정도로 여기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도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충견이다. 집안 살림을 내다 파는 안 도둑은 물면 안 되고, 대문 밖에서 들어오는 낯선 사람(손님일지도 모르는)한테만 짖어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위헌적 발상이다. 감사원이 집 지키는 워치독(watchdog)이 맞다고 해도, 헌법이 규정하는 감사원의 임무는 명백히 안 도둑을 잡아내는 것인 까닭이다. 외부 침입자를 지키는 건 외교부와 국방부 그리고 군이 할 일이다. 분명 감사원이, 감사원장이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임 전 실장 눈에는 그것이 ‘일탈’이요 ‘정치’로 비치는 것이다.
 
개가 주인을 무는 꼴?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사실 그런 시각은 그가 처음이 아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이 자신과 가족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일 때 이렇게 말했었다. “국민들은 검찰 개혁을 요구하면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고 있으며,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견제를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후보였던 이원욱 의원도 지난해 “임명받은 권력이 선출권력을 이기려고 한다. 개가 주인을 무는 꼴”이라고 외쳤다. 같은 당 김두관 의원 또한 지난해 법원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복귀를 판결하자 이런 분노의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권력을 정지시킨 사법 쿠데타에 다름 아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헌법적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그는 ‘윤 총장 탄핵’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주위에서 우려하자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이 여권 전체를 대변한다고는 할 수는 없을 터다. 하지만 대체로 여권은 선출된 권력이 마치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곧 대통령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사고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들이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알다시피 국민주권이란 국가의 최종 의사결정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헌법 제1조 2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 그것의 표현이다.
 
국가의 주인이 곧 국민이라는 말인데, 따져보면 ‘국민’이란 말이 허상에 가깝다. 마치 대기업의 ‘소액 주주’와 같다. 모든 사람이 소유권을 가졌다는 것은, 아무도 소유권을 갖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이른바 선출 권력이라는 한 줌의 무리가 껍데기에 불과한 ‘국민의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왕조적 민본사상의 한계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무리들이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 게 더 가증스럽다.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유신 헌법이 더 솔직하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유신 헌법 제1조 2항)”
 
쉽게 말해 국민이 주인이 될 때는 국민투표를 할 때 딱 한 번이란 얘기다. 나머지는 선출 권력이 다 알아서 하니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현 정권의 태도·모습과 빈틈없이 겹치는 게 아이러니다.
 
국민주권의 실현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될 때만 가능하고, 국민주권의 행사는 정치적 기본권을 구현함으로써 이뤄지며, 정치적 기본권은 표현의 자유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지금의 선출 권력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일체의 다른 해석을 금지하고, 북한 인권에 대해서도 정부의 판단 외에는 다른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우리가 이렇게 결정했는데 어딜 감히! 이런 논리다.
 
현 정권이 국민주권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선출 권력의 잘못을 사후 응징할 수 있다. 최장집 교수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차대전 당시 독일군 공동 총사령관이자 군사 독재자인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막스 베버의 논쟁이다.
 
베버가 말한다. “인민은 그들이 신뢰하는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선출한다. 이어 선출된 사람이 말한다. ‘그대들은 아무 소리 말고 복종하라. 인민과 정당들이 지도자와 상충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이에 루벤도르프가 답한다. “그런 민주주의라면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자 베버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 다음에 인민은 심판할 수 있다. 만약 지도자가 잘못한다면, 그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 (『소명으로서의 정치』)
 
극단적인 예지만 선출 권력의 권력 행사가 클수록 사후 제재의 강도도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엄청난 사후 제재를 예방하기 위해서 감사원과 검찰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정부에서 출범한 공수처 또한 마찬가지다. 사후 제재가 크면 선출 권력의 피해도 크겠지만, 국민이 입는 피해도 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현 정권은 감사원과 검찰의 예방 작업을 방해하고 있다. 곧 국민주권주의의 부정이다. 대신 이 정부는 지극히 유교적인 민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민본(民本)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민유방본(民唯邦本)’에서 비롯된 말이다. 오직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이 백성이 보고 듣는 것, 즉 민심이 천심이라는 게 민본주의의 기본이고, 맹자 같은 이는 “천자의 자리는 하늘이 준 것이요, 백성이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백성은 정치적 객체일 뿐이다. 덕치(德治)나 왕도(王道)·위민(爲民) 같은 용어들은 결국 어리석은 백성을 올바로 이끌고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가 강하다. 어떠한 공론화 과정도 없이 선출 권력인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탈원전이 결정되는 게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왕조시대의 민본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선출 권력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의 진짜 주인인 국민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괴테는 엉터리 연금술사에 비유했다. 국가는 모루고 지배자는 망치, 국민은 쇳덩이다. 망치로 아무리 두드려도 쇳덩이가 금이 되지는 않는다. 금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믿은 국민만 죽을 맛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선출된 권력
문제는 늘 선출된 권력이었다. 히틀러까지 거론할 것도 없이, 의회 난입 사건을 부추겨 인명사고까지 일으킨 도널드 트럼프 역시 선출된 권력이었다. 4년 동안 트럼프에게 달라붙어 그의 거짓 선동과 분열 조장, 인종 차별에 눈 감고 귀 막았던 공화당 의원들도 모두 선출된 권력이었다.
 
그것은 산업화된 정치 시스템 탓이다. 마이클 포터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권력의 배신』에서 이 선출된 권력, 즉 “정치권력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국의 정치 시스템은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이익 추종자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는 정치 산업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대로라면 기득권을 장악한 두 거대 정당만이 승리하고 국민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두 거대 정당의 기득권 챙기기에 국민은 골병이 든다. 지난 총선 전 거대 정당의 독점을 막는답시고 연동형 비례대표 선거법을 도입했지만, 이들은 ‘위성정당’이라는 기상천외 꼼수를 발휘해 두 거대 정당을 제외한 소수당의 입지를 더욱 좁혔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권교체라는 게 의미가 없다. 국민은 교대로 권력을 남용하는 독점적인 두 거대 정당에 교대로 농락당할 뿐이다. 그들은 정치의 최종 소비자인 국민은 안중에 없다. 다음 선거만이 관심인 까닭이다. 당 지도부와 권리당원들의 눈에만 들만 그만이다. 해결해야 할 수많은 현안은 미래세대에 넘겨 버린다. 이들은 늘 비선출 권력, 즉 선거와 정치에 휘둘리지 말라고 임명직으로 만든 공무원들을 장악하고자 한다. 그래서 늘 문제가 돼오지 않았던가.
 
이런 선출된 권력의 위선을 극복하려면 중도적인 국민들이 깨어나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국민을 생각하고 오늘의 문제를 고민하는 중도 온건파들이 설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 앞에는 또 당할 일만 남는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