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매사 음영이 있는 법, 어둠이 있으면 밝음도 있다. ‘민주주의 발전은 필연’이란 근거 없는 낙관론이 깨졌고 겸손하고 용감해야만 민주주의의 역진을 막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특히나 교과서로만 접했던 민주주의 작동 원리를 다시 탐구할 기회도 얻었다. 민주화 세력의 진정한 민주화 기여다. 2020년 세밑 이네들의 곱씹을만한 대표적 활약상을 추렸다.
‘민주화’ 훈장 단 집권 엘리트인데
민주주의 몰이해로 곳곳에서 퇴행
다시 민주주의 성찰 계기 삼아야
추·윤 갈등 와중 두 번째 행정법원의 판단이 나오자, 할 일을 한 법원을 향해 여권은 “사법의 과잉 지배”(이낙연 대표), “입법을 통해 검찰·법원이 국민에게 충성하게 만들겠다”(김용민), “일개 판사의 법적 쿠데타”(김어준)라고 공격했다. 바로 직전 문재인 대통령이 했다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본의였는지 애매하지만 말 자체는 맞아서다. “우리 헌법정신에 입각한 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하게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②민주적 통제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검찰개혁’과 한 덩어리로 빈번하게 나온다. 정권 초기에 ‘적폐수사’를 하는 게 검찰개혁이었는데 근래엔 현 정권 수사를 막는 게 검찰개혁이 되었듯, 한때 검경수사권 조정이나 특별검사제 도입, 검찰인사제도 개혁 등이 민주적 통제였다면 이젠 정치권력의 간섭이 민주적 통제가 됐다. 한마디로 민주(당)적 통제다.
1년여 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3년여 소장으로 지냈다)의 ‘검찰과 민주주의’ 좌담회에서 “전문가나 국민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방향”이란 설명과 함께 지방분권적·민주적 검찰인사위원회가 제시됐다는 점을 일깨우고 싶다.
③다수결도 있다. 의회의 작동 원리는 다수제와 합의제의 혼합이다. 국회법의 160여개 조항 곳곳에 ‘합의’(15차례)와 ‘협의’(54차례)가 반복 등장하는 이유다. ‘협치’는 그러나 선전일 뿐 현실에선 다수제만 가동했다. 그 결과물이 “농담을 할 때마다 법이 되고 법을 만들 때마다 농담”(미국 사회비평가 윌리엄 로저스)이 되는 현실이다. 지금 기세대로라면 누군가의 출마를 강제하는 법도 만들 수 있을 게다.
이러는 사이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유지되던 여야 간 상호 관용과 절제의 관습은 속절없이 사라졌다. 제아무리 필리버스터가 국회법에 ‘의사진행방해’가 아닌 ‘무제한 토론’으로 성안됐다해도, 다수의 지배에 맞선 소수의 권리 존중이란 정신이 사라져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네들은 소수파의 의사진행방해를 방해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곧 그만둘 듯 6시간 30분간 말을 이어가 결국 야당 원내대표의 필리버스터를 방해한 의원(이재정)이 그 예다.
이뿐이 아니다. 법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원칙이 법치인데 이것도 두렵다고 했다. 그러더니 마키아벨리의 관찰(“오직 권세 있는 자들만이 공공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기 시작했다”)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또 다수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수가 내리는 판단이 틀릴 수 있고 거기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이네들은 자신들만 도덕적이어서 어떤 잘못을 해도 반대파보다 낫다고 믿는다. 오만이다.
“모든 성공한 혁명은 조만간 자신이 몰아냈던 폭군의 옷을 입는다”(미국 역사가 바바러 터크먼)던가. ‘민주화’란 훈장을 가슴에 단 집권 엘리트도 그렇다.
고정애 논설위원